[2009년 11월 23일]

   읽던 책을 덮어보니, 책 사이사이 마다 무수하게 붙어있는 쪽지들을 본다. 노란색의 그것들을 보며 나는 은행잎을 생각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한다는 어느 시인의 시를 생각하고, 그 여성시인의 연정시를 생각하고, 올 가을은 유난히 단풍잎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로수 길가를 많이 걸어보지 못하고서 한해를 보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고, 내가 사는 동네에는 마땅한 가로수 길가 하나도 없는 촌락임을 생각하고, 책 사이사이 붙어있는 쪽지들을 보며 노란 은행잎을 떠올리는 나를 보며, 나는 도시인임을 실감한다.

   포스트잇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싫어서, 일일이 쪽지라고 단어를 바꿔쓰는 나를 보며, 나의 언어가 상업에 물들었음을 한탄한다. 가로수가 있는 주택가에서 가로수도 없는 어느 촌락으로 밀려난 이후로, 나는 완전한 도시인이 되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지만, 나는 그 이후로 언제나 전원이 아닌 세련된 도시를 동경했었다. 하지만, 가끔 가끔씩은 작은 시골에서 사는 꿈을 꾸어본다. 노란 은행잎을 실컷 밟아볼 수 있고, 나의 언어가 비로서 몸을 팔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 꾸어본다. 그곳에 가서도 나는 아마 포스트잇이라는 말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꿈꾸는 것이 어디 죄가 될까.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주절주절 글을 쓰다보면, 자꾸만 연필과, 펜과, 종이와, 또 시와, 글과, 밤과, 고요와, 그리고 눈물과, 감성과, 상상과 화해하고 싶다. 나의 유년과 나의 학창시절을 내내 함께 해온 그것들을 나는 잊고서 이제는 펜과 종이 대신, 글과 시 대신, 어둠과 그 고요함 대신, 눈물도 없이, 감성도 없이, 상상은 더더욱 없이, 이렇게 야밤 중에 환하게 불을 밝히고서, 네모딱딱한 자판을 두들기며, 눈물 한방울은커녕 감정의 작은 동요도 없이, 이렇게 단지 글자를 새겨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두운 밤이면 언제나 이불 속을 기어나와서 작은 등불 하나만을 켜놓고서, 문단구분도 없이, 삭삭소리내며, 눈물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글을 쓰던 시절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