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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4일]
마르크스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마르크스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물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숙명적인, 어떤 존재론적인, 그런 강렬한 의미로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령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여기에 나마 무엇이라도 한번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판을 두드린다. 두 가지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나의 경험에 대한 것들이다.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시끄럽고 장난끼 가득하면서도 내성적이고 부끄러움 많은 아이였다. 잘 울었고,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런 면에서는 참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초등학교 몇 학년때였을까, 외환위기로 가계가 흔들리고, 저소득층이 되었지만, 그것이 내게 큰 트라우마로 자리 하지는 않았었다. 우리는 예전 집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즈음부터, 가난에 대해서인지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찍힌 꽤재재한 모습이 나는 창피했다.
가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지를 하기 시작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우리는 집을 팔고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그곳은 가난한 동네였다. 그래서 그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사는 동네를 숨기고, 체육 시간 전에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교복에 적힌 브랜드 없는 상표를 누가 볼까 조마조마 했다.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정말로 그때부터 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고등학교 정도 들어가고 나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무렵 나는 도시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가족사와 나 자신이 가지는 소외감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였다. 그때는 2007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였는데, 선거는 내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져다 주는데 좋은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슬슬 언론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한 보도가 연이어 나올 때쯤, 나도 나의 첫번째 선거를 성실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급진적인 사고를 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강렬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런 아버지 밑에서 20여년을 생활하면서 경험한 것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셨으면서도 가난해야만 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 외환위기로 가계가 쓰러진 것도 자신의 탓이라고 믿는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 좋은 일자리에서 비리를 침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내놓아야만 한다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아버지는 수십년을 한나라당, 지금은 새누리당을 옹호하며, 아직도 빨갱이에 대해 분노하신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어느날 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읽게 되었다. 내가 왜 그 책을 읽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의 권유도 없었고, 어디서 관련된 것을 읽어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날 마르크스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공산당선언을 빌려다가 보았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마르크스는 나에게 유령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다. 내가 그의 이론과 사상에 확실한 믿음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계속 내 주위에 맴돌고 있다.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성격상, 어떤 것을 손쉽게 잘 고르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내가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이론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사리분별하고 분명한 것인지 검증받아야 하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나 최근들어서는 마르크스의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특히나 마르크스의 핵심을 차지하는 가치론은 당연 문제적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이라는 방법론 역시, 그 의미와 유용성을 찾는 일은 언제나 고민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어떤 좋은 함의를 제공해주는 대상이라면, 나는 그 과학성은 배격하고 공산당선언과 같은 짧은 팜플렛을 통해 좋은 교훈을 주는 고전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계급투쟁이라거나, 유물론이라거나, 역사철학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그런 낱말들을 줄줄 나열하는 것으로 그 함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으로 그 유용성이 다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론적 과학성을 담지해야만 할 것이다. 때문에 과학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로서는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내가 현재로서는 별다르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언제인가 이모 교수를 따라서 간 학술대회에서 만난, 전모 교수는 내게 마르크스를 배워서 어디에 쓰이냐고 물었다. 그는 소싯적에 운동을 하고, 대학원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하다가 이제는 그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모 교수도 내게 무엇을 하든 교조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나. 정모 교수는 내게 자기만의 물음을 가지라고 몇번이고 강조를 했었다. 유모 교수는 내재적 독해를 하라고 했다. 자본론 세미나를 함께 하는 류모 팀장도 비슷한 발언을 한적이 있지만, 그보다 그가 내게 강조했던 말은, 자신의 학생시절을 회고하면서, 지금이 한가하게 근대성을 논할 때인지에 대해서 물은적이 있었다. 그는 이진경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좌우간, 이 모든 내게 부과된 질문들은 사실, 대게 비슷한 맥락의 것들이고, 사실 마르크스는 나에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말해보라는 듯하기도 하다. 나는 마르크스가 대단히 흥미롭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말하자면 나는 마르크스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종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은 당연하다. 그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겠다. 아니, 그보다 그가 기여한 이론적 영역들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만큼, 그 유산을 어떻게 나의 물음과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마 모범적인 대답일 것 같다. 미리 생각하고서 내린 결론은 아니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