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말하면서, 나만큼 마르크스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이해하고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변명이지만, 나에게는 선배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고, 또 나 스스로 그것들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그것들을 피했다. 따라서 나는 마르크스의 작업 –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작업, 그러나 비단 이것으로 한정되지 않으리라 – 에 대해서 나는 오로지 나 스스로를 준거했고, 따라서 아무것도 준거하지 않았고, 제멋대로 무질서하게 독해해왔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만큼이나 불충(不充)한, 그리고 불충(不忠)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과연 나는 그것들을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당당하게 그렇다는 말을 하기 저어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몰이해(沒理解) 혹은 난-이해(難-理解)는 계속적으로 마르크스가 아닌 현대경제학의 세련된 수사에 대한 유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일원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관계해오고 있는 두 조직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학생조직, 다른 하나는 노동자조직이다. 그리고 양자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두고서 매우 상이한, 심지어 매우 갈등적인 이해를 보이고 있는데, 오늘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는 양 조직이 무어라고 말하든, 그래서 ‘나’는 어떻게 이 작업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함이다. 『자본』으로 대표되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이 작업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특히 방법론에 관계하여.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마르크스의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때문에 본 단상을 이르러 ‘감정적’인 것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어라고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지 않는 것은, 그것을 계속해서 회피하는 것은 다분히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조직의 이해, 궁극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나의 이해를 둘러싸고서, ‘추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분석이고, 때문에 이 추상의 방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일반이 가지는 절대적 법칙에 대한 인식론이다. 한편, 알튀세르는 – 물론 필자는 알튀세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다 – 마르크스의 방법을 헤겔의 그것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단지 헤겔의 수사를 거꾸로 한 것이 아니라 역사 유물론에 근거하여 도출된 새로운 개념들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방법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과잉결정의 원리와 사회구성체라는 대상이 도출된다.


나는 지금 서술한 두 이야기가 어떻게 합치되는 것인지, 혹은 어떻게 상충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양자 모두 변증법을 인식론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 강조점은 다른 것 같다. 전자에서 변증법이 철저하게 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추상의 수준에 대한 문제에 그 강조점이 있다고 보인다. 한편 후자에서는 헤겔의 수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마르크스의 그것을 말하면서, 새롭게 도출된 개념들, 즉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용되는 ‘역사적 개념들’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나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할 때에, 단계론보다 속성론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따라 단지 자본주의 비판을 반복하기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 무게중심을 두면서도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속성에서 자본주의 일반의 모습을 확인하는 아이러니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도 나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있어서도 같은 방식의 ‘선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주체보다는 구조가 가지는 관계성들에 천착하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서도 논리를 부단히 확인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원론적인 이야기가 정리되는 것 같다. 마르크스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에 대한 속성(논리, 법칙)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는데, 그것은 역사적 개념들을 추상화해내고 이를 토대로 비판이 실천된다. 또한 이때의 역사적 개념들은 다분히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관계들에 대한 표현들이다. 이러한 식의 원론적 정리가 현재로서 나의 이해가, 그리고 본 글이 갖는 한계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정리에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유의미성을 도출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관계’-‘구조주의’-‘경제학’의 관계들에서 모종의 공통적인 지적 지반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이는 내가 소박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지적 선호 – 따라서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 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나는 이처럼 마르크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들에 대해서 지구 끝까지 천착할 생각은 없다. 특히나 추상의 수준과 관련하여 추상의 방법이 담지 하는 효과는 결국 (자본주의 붕괴라는) 미래예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필시 현대경제학이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인 것 같다. 이에 따라 소박하게 이 문제를 축소하자면 추상의 방법론이 도출해낸 역사적 개념들이 현대경제학으로 실천될 수 있는 좋은 ‘테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