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상에서 (주류) 경제학과 학생들과 이윤율 문제에 대한 잠시간의 대화를 토대로 쓰는 글이다. 깊은 논의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대한 문제에서,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씩 정리하도록 하자.


먼저, 이윤율 저하와 회복에 대한 문제설정은, 마치 ‘적정 이윤율’이 존재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지닌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적정 이윤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율은 높을수록 좋다. 이윤율 하락은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요건이다.


나아가, 과거 황금기에서의 이윤율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전후경제와 기술혁명 등의 호조건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이윤율이 높았던 것이지, 지금이 그때에 비해서 이윤율이 낮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이상할만한 상황이냐, 는 반문이 있을 수 있고 있었는데, 동의할 만하다.


또 하나는, 이윤율이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면 체제존속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 는 말이 있었는데, (반만)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존속의 조건은 박탈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0이 되기 때문에 사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혁명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윤율 저하 법칙에 대한 엄밀한 비판은 아니다. 이윤율 저하 법칙이 유지되고 있는 이상, 이윤율의 상쇄요인으로 그것이 만회되어 일정한 이윤율이 유지되더라도, 그것은 상쇄요인의 지속적 공급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므로, 체제의 조건은 지속적으로 위태롭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특별한 내용으로, 시장주의자들은 애초에 장기에 이윤이 0이 되는 상태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지 않느냐, 하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사변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으나, 불합리한 비판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메커니즘을 비교해볼 수 있다. 시장주의자,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 신고전파라고 좁혀보자. 신고전파의 메커니즘에서 이것은 무한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쟁에 기인하여, 자원의 최적 분배로서, 이윤이 0이 되는 과정을 상정한다. 반면 마르크스의 경우, 노동과 자본의 임금노동관계에 기초하여 투하된 상품의 가치가 비용가격으로 전형(轉形)되고, 이것이 다시 경쟁을 통해 평균이윤율이 형성되어 생산가격으로, 그것이 다시 시장가격으로 전형되는 과정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고전파는 경쟁을 통한 최적분배로서, 마르크스는 기술의 편향적 진보에 따른 자본축적 고도화로서, 이 문제를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이윤율 저하라는 ‘현상’이 무엇으로부터 유발되었느냐 질문할 수 있는데, 현재의 이윤율 저하를 두고, ‘완전경쟁’에 더 가까워졌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는 독점자본주의의 시대가 아닌가.


둘째로, ‘정상상태’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stationary state냐, steady state냐, 묻는 것이다. 하지만 신고전파의 물음에서 이윤율이 0이 되는 상태가 완전경쟁의 상태이고, steady state, 즉 균제상태이듯이, 단지 이윤율 하락하는 모습 자체에서 파국의 모습을 모두 그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완전경쟁의 상태에서 이윤율이 0이 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공황상태에서 나타나는, 유통의 중단, 재생산의 불가능, 다시 말해서, 1930년대의 대공황 상태를 묘사한다면 좋을 것이다. 상품이 팔리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정상상태에서는 단순히 이윤율이 0이 되는 상황만이 아니라, 자본축적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조금 더 명료하게 지적해야할 것은, 마르크스의 정상상태에서 자본축적이 하락하는 모습은 다름 아니라, 생산수단의 가치가 파괴되고, 생산수단이 사용가치를 그대로 두고서 유휴 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파국적 상황으로서 공황은, 앞서 언급했던 자본운동의 중단과 절단을 상정하는 모습이다. 성장의 정체, 균제를 넘어서, 운동의 중단이고 절단인 것이다.


나아가 한 가지 논의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고전파에 있어서 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거기서 상품의 가격이란, 교환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이다. 만일 완전경쟁시장에서 가격은 이윤이 0이 되는 지점이고, 이것은 가장 효율적인 상태를 상정하는 것인데, 한편으로 이것은 거래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지점이다. 마치 임금노동시장에서 임금이 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지점이듯이.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러한 지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의 운동 동기는 언제나 잉여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순재생산은 결코 자본의 목적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