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공황에 대한 짤막한 글을 쓴 바 있다. 책을 읽던 도중 당시에 글이 지적되어야 할 부분들이 발견되어, 간단하게나마 글을 남기기로 하였다. 그것은 이윤율에 대한 것이었다.


신고전파의 경제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완전경쟁시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에서 이윤이 0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그런 일은 자본주의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윤(율)이 0이라면, 운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속성은 기필코 자본축적이 다름 아니다.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가치가 공존한다. 경제순환이라는 것은 이러한 상품들이 거래되는 운동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운동이라는 것은 C – M – C가 아니라, M – C – M’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그것은 자본축적이 그것의 내재적 동기임을 의미한다. 즉, 자본축적의 동기는 가치가 다름 아니라는 뜻인데, 한편 우리는 자본가도 사용가치를 원한다는 전제를 세워볼 수도 있다. 자본가를 위한 사치재가 존재하듯, 자본가도 사용가치를 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축적의 동기로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없다. 스위지는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ⅰ) “그러한 주장은 자본가가 갑자기 축적에 대해 흥미를 잃고 ‘사용가치에만 관심을 갖는 일종의 도덕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 동시에”

(ⅱ) “자본가가 ‘어려운 시기’에 직면하면 단조롭긴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긴축의 생활태도를 취하기보다 흥청망청하는 생활태도를 취함으로써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p.203)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위에 대한 구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읽은 기억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다만 비슷한 취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에 있다. 『자본론』 1권 하, 제2개역판, pp.805-816.


스위지는 이번에는 마르크스(『잉여가치학설사; Theorien über den Mehrwert, Ⅱ/2, p.265)를 직접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긴다.


“자본주의 생산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문제이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잉여가치 증대의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을 추동하는 동기다.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추상을 통해 그 본래의 토대를 제거하고 자본주의 생산을 생산자들의 즉각적인 소비와 관련이 있는 생산체제로 만들어버리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스위지, 같은 책, p.203)


고전파경제학 그리고 속류경제학과 구분되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가 추상해낸 것이, 오롯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관계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