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얼마 전에 있었던, 세 개의 담화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나의 연인과 대화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그녀는 수학교재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내가 파편적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그 수학교재 출판사는 이른바 수학물신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에 쓰여있는 글귀를 내게 말하여주었다. 그것은 말한다. 캔음료의 캔이 둥근 이유는 원 형태가 가장 적은 재료로 가장 많은 용량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과일이 왜 둥근지도 유추할 수가 있다. 그것 역시, 둥근 모습이야말로 가장 많은 표면적을 보유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두 개의 담화가 추가적으로 기입된다. 하나는 오랜만에 만난 이모군과 학교 앞 카페에서 있던 이야기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지식 특히 수학은 지적 노동의 생산물인가에 대한 문제를 주고받게 되었다. 나는 지식은 인간의 지적 노동의 생산물임을 역설하였다.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는 얼마 전 강모 선생님과의 술자리에서 이야기였다. 나는 강모 선생님께 수학적인 것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두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는 사실 문제는 계급투쟁의 문제라는 것, 다른 하나는 방법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캔음료의 형태와 과일의 형태가 동일한 것은 과연 같은 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캔음료의 형태를 고안하는 문제는 어떤 경영학적 논리에 의해서, 고안되었다고 보기에 다분하다. 그러나 열매의 형태를 같은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나치게 사후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또한 만일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도, 과연 인간사회를 탐구하기에 충분한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캔음료로 돌아가보자. 만일 아니 실제로 캔음료의 캔이 둥근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회가 효율성에 입각해서 운용되지 않다면, 캔음료의 형태는 그렇게 주조되지 않는다.


캔음료의 형태와 과일의 형태를 결정하는 논리를 동일한 것, 정확하게는 그것을 동일한 수학적 논리로 환원시키는 방법은 공교롭게도 몰역사적이며 수학 그 자체를 물신화하는 방식이다. 마치 주류경제학에서의 논리처럼 말이다. 수학 그 자체로 세계는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방법은 정확히 수학이라는 방법을 대상, 즉 실재 그 자체로 대체시키는 것이고, 나는 이것을 수학 물신주의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학 그것이 결국 인간노동의 산물이고, 수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