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 가득한 밤이다. 때문에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너무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가 싶다. 차라리 울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지금 꽤 이성적이고, 슬픔 보다는 어떤 분노 차있다. 때문에 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부터 파고들어 보기로 하자. 비록 이 글이 매우 조야한 비선형의 것이 되더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아무리 우회하고 회피하더라도, 결국에 나는 배움에 뜻을 두었다. 어쨌거나 나는 공부하기로 했었고, 그것 자체는 아---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고 그러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Given to)’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공부를 하면 된다. 당장 이 글을 다 쓰고 피곤하겠지만 다음날 늦지 않게 학교를 가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이 적의는 무엇 인가. 나는 어떤 적의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적의는 내가 평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적의는 착취에 대한 것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 인가. 당장에 문제되는 것은 사실 바로 나의 학교다. 휴학기간을 합쳐서 꼬박 7년을 적을 두고 생활하고, 앞으로 최소한 2년 더 적을 두고 생활해야 하는 나의 학교다. 이 지긋지긋한 학교, 그리고 내가 항상 분노하는 나의 모교 교수들, 나아가 이제 나의 동료가 된 연구실의 선배들, 그리고 내가 수년간 관계하고 있는 학회까지. 사실 나의 적의 대상이다.


안암은 내가 들어서지 못한 관문이었다. 애당초 스라피언도 포스트케인지언도 내 취향이 아니긴 했지만, 내가 그런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리고 확실하게 말하지만 안암은 못 들어간 것일 뿐이라는 점도 당연하다. 하지만 박모 교수도 그 밑에 들어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동갑내기 박모군도 사실 나의 적의대상이 되었다.


척박함. 내가 이 척박함을 타개하고자 얼마나 헌신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떳떳하지만은 않다. 아마 이 척박함은 나의 안일함에 대한 비용이겠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이 비용을 치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지경에 왔다.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이 척박함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 그 어떤 것도 이 척박한 공간에서 거저 주어진 것은 없다. 말했듯이 이것은 일종의 내가 치러야만 하는 비용이지만, 나는 수동적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는 유학을 가서 한국을 뜰 수도 없었고, 명문대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진주로 떠나지도 않았다. 나는 수원의 모교로 남았다. 사실 손쉬운 선택이었다. 영국 유학을 떠난 지인의 충고는 사실 맞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서 모교는 공부 그 자체만을 생각하자면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때문에 손들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모교에 남은 이상 누구도 내게 거저 전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나는 이 적의를 아무렇게나 휘두르기 보다, 또 그렇다고 녹슬고 무뎌지게 팽개치기 보다 심중에 품고 날을 벼르고 벼르는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은 2년간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고 졸업하는 방법뿐이다. 논문주제에 대해서도 간간히 고민하고 있지만, 우선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말하자면, 결국 선택지는 3개뿐이고, 어떤 선택이든 어느 정도는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그 선택지는 바로 새고전파 비판, 새케인지언 비판, 포스트케인지언 비판. 이것이 전부다. 각각의 의미를 말하자면


첫 번째는 인적자본론, 사회자본 등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경제라는 환상에 대한 비판이다. 두 번째는 대불황의 시대를 주름잡는 미국 새케인지언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비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경제학 비판은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세 번째는 사회적 경제론을 포함해서 한국에서 또는 세계적으로 새로운 대안으로 대두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고 말하자면 이것들을 포스트 신자유주의 또는 포스트 포스트 신자유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비판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세 번째를 하고 싶다. 물론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게 내가 가장 근래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기에 충동적인 문제는 전혀 아니다. 다만 이것이 동시에 안암 패거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