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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차,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예술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몇자 써보자면, 이렇다. 전시에 몇가지 챕터들이 있었지만, 좀 뒤죽박죽으로 써보도록 하자.
썸네일 이미지로 나온 작품(https://fbcdn-sphotos-e-a.akamaihd.net/hphotos-ak-xfa1/t1.0-9/p526x296/1380483_688637524505284_7180289300378689211_n.jpg)은, 가장 첫번째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에 뒤샹의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접목되어 있는데, (추상)예술과 (레디메이드)산업이 경계는 아마, 디자인과 예술이라는 주제(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지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우연하게도 "사물학"이라는 접점에서 이루어졌다. 디자이너와 예술가는 모두 어떤 사물에 천착할 공통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물(Object)라는 것은 흥미롭다. Object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사물, 물건이라는 뜻 외에 목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사물의 존재론은 어떤 목적과 동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은 어떤 목적을 합당하게 [그러니까 합목적적으로] 사용될 때에서야 비로서 그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다. 연필은 글씨를 쓰기 위함이고, 지우개는 글씨를 지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존재의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예술은 어떤가, 예술은 그 목적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술은 경제적 의미에서의 유용성은 없다. 예술이 경제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베블런적 의미에서의 과시적 소비를 위함일 뿐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이 예술의 "진실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진실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 그 자신에게 봉사한다.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Object의 미술에 있어서 그 쓸모를 언뜻 확인해본다. 널리 알려져있듯이, Object는 미술에서 오브제, 일상에서의 사물이 그 쓸모를 버리고 낯선 쓸모로서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이 주어진 목적을 벗어던질 때, 그것은 더이상 사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예술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물이 예술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제는 오래된 일이다. 작가들이 보기에 이제는 사물이 예술이 되는 시대와 예술이 사물이 되는 시대는 혼접된 것 같다. 쓸모를 고민하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사물은 예술과 디자인의 혼란스러운 경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고민들은 참, 낯간지럽다.
좌우간, 상황이 이렇다면,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해 볼법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예술"은 어떠해야 하느냐고. 아마 작가들이 생각하고 있는 주제라 할만하다. 작가들은 이미, 예술과 사물의 중간쯤에 있는 디자인에서 그와 비슷한 것들을 발견한다. 한 작가가 말한다. 디자인은 사물에 대한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사물의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이고, 동시에 유용성을 위한 어떤 실험이라고. 어떤 급진성을 담지하는 듯한 이 말은 다른 말들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혼자 생각하는 상상은 그냥 상상일 뿐이지만, 그 상상을 다른 사람도 인지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디자인처럼) 그것은 어떤 비전이라고. 마치 오노 요코가 했던 말과 대단히 유사한 말이다. 요코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전혀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것이지만, 전시의 끝무렵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등장한다. 하지만 내 편견 때문인지, 나는 예술가들이 말하는 <자본론>에 대해서 역시나 전혀 신뢰할 수가 없다. 3D프린터가 등장하게 되면서 생산수단을 일반 노동자들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급진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개소리 하는 양반이 한명 있었다. 기술문명에 대한 막연한 또는 순진한 예술가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트위터로 혁명도 했고, 컴퓨터 해킹으로 국가도 타도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