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나는 매우 오래 전부터, '불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 또는 상태 때문에 종종 악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주로 밤에 나타나고, 내가 아무런 성과 없이 하루를 보낼 때 나타난다. 주로 그렇다. 불안의 증상은 보통, 자기 파괴적으로 나타난다. 성과없이 하루를 보낼 때 나타난다면, 더욱 더 성과없는 시간을 보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불안을 어떻게 다룰까, 아멜리 보통의 불안 이라는 책도 꽤나 인기라지.


오늘 나는 이 불안 이라는 것이, 어쩌면 나의 행동패턴을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상당히 최선과 최악이 불안정하게 왔다갔다 하는 타입의 행동패턴을 가졌다. 잘 될 때는, 잘 되기 때문에 더 잘 되고, 잘 안될 때는, 잘 안되기 때문에 더 잘 안된다. 말하자면 자기실현적 예언, 또는 되먹임(feedback)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아마도, 내가 잘 안될 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불안의 정 반대가 존재한다는 말이고, 이건 나로서는 쉬이 떠오른다. 나는 이 이른바 '잘 될 때'는 그 삶의 욕구와 자신감, 동기부여가 아주 잘 된다. 불안할 때와 반대로 말이다. 말하자면, 나에게는 불안정한, 두 개의 균형 상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상 이것을 최악의 불안과 최선의 불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이야기를 잠깐 추가하자면, 최선의 불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작년 11월 즈음, 내가 어느 여인과 첫키스를 하고서 들떠서 동네 개천가를 신이나서 뛰어다니던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당시 그녀는, 나의 이 모습을 보고서,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고 회고한다. 이때야 말로, 최선의 불안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장면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따라서, 나는 심리학이나 문학책에서 불안에 대해서 무어라고 부르는지와는 무관하게, 시스테믹한 관점에서 이것을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균형이 존재하나, 안정적이지 않고, 유일하지도 않은, 비선형의 동학 모형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복잡계 시스템.


이러한 관점에서 불안을 평가한다면, 꽤 흥미로운 해법이 나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불안 그 자체의 정량적 관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고, 불안은 그렇게 접근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것을 늘리고 줄이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물론, 힐링담론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고, 상담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또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는 새로운 관점을 요청한다.


우리가 요청한 관점에 따르면, 불안은 독립적인 요인도 아니고, 다시 말해서 불안의 변화는 시스템 그 자체에 내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안은 어쩌면 마음에 포함된, 증감하는, 어느 요소라기 보다는, 마음이라는 시스템의 운동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균형은 유일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정책(policy)이 필요하다. 좋은 균형에 오래 머물고, 나쁜 균형에서는 금방 빠져나가도록 하는, 제3 부문에서의 충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내가 공부하는 학과의 사고방식의 전형이다. 말하자면, 생기론(vitalism)이 아니라, 기계론(mechanism)이다. 인간을 기계로 환원시킨 사고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