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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유도 없이 나락으로 간다 /
무의미한 물방울이 모여 / 운명같은 강을 이루고 물결을 이루어 / 나룻배와 뱃사공을 / 삶의 나락으로 밀어낸다 /
늙은 손을 붙들고 / 잡히지도 않는 물줄기를 애써 붙잡아보지만 /
날개를 단 은어(銀魚)처럼 /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구나 /
언제인가 이제 / 붙잡을 물줄기도 없는 나락이 오면 /
썩은 손을 내리고 / 먼지가 되어 쉬는 날도 오겠지 /
「강(江)」, 2008.01.31
위는 내가 18살 때, 끄적거렸던 시구이다. 내용인즉슨, 삶의 나락으로, 도시의 나락으로, 밀려나고 있는 나의 삶을 강과 뱃사공에 비유하고 있는 자조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그 시절 나의 일기장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지금에야, 아무렇지 않게(?) 대면하고 있지만, 학창시절 나는 이 도시에서의 내몰리는 내 삶이 창피하고 한스러웠다. 그것은 상대적 박탈감과 배제에 대한 소외감이었다.
나는 서울 도시변두리에서 태어나, 성남시로 이사를 갔고,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삶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였다.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현대아파트에서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그곳은 한동안, 나의 노스텔지어이자, 유토피아였다. 나는 현대아파트 앞에 있던 현대유치원 백합반에 다녔고, ‘씽씽이’를 타고 놀았고, 이따금 엄마와 인근 상가단지에 가서 쇼핑을 하였다. 그리고서 나는 분당구 야탑동(당시의 이름은 중탑동이었고, 지금은 야탑2동인가로 개명되었다.)의 어느 빌라단지로 이사를 갔다. 건영빌라였다. 그리고 나는 줄곧 서현동에서의 삶을 그리워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내가) 일곱 살 때’라는 수사를 통해서 재현되었다. 내게 있어서 일곱 살 때의 기억은 서현동 현대아파트에서의 꿈같고 낭만적인 어떤 것들이었다. 실제로 내 기억하는 어떤 기억들이 정말로 내가 일곱 살 때의 기억이였는 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낭만적인 기억들은 모두 ‘일곱 살 때’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고는 했었다. 그리고 형은 나의 그런 행동들을 놀리고는 했었다.
그리고 IMF가 터졌고, 아빠는 아빠 형제들과 함께 하던 가구사업이 망했고, 이직을 했으나, 그곳에서도 실직을 하였다. 물론 그때 당시의 우리 집 가계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였다. 물론 그것은 스물다섯 나이의 지금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정확히 아버지의 사업이 언제 망했는지, 언제 실직을 하셨는지, 또 그것이 IMF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실직과 재취업을 반복하셨고, 순서대로 어떤, 어떤 직업들을 가지셨고, 어떻게 실직을 하셨는지, 벌이가 어떤지, 나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야탑동으로 이사를 가고, 몇 년 후 가계는 대단히 안 좋아졌고, 우리 집은 쌀을 걱정해야 했다.
‘야탑동’은 그 자전적, 또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이른바, ‘성남’과 ‘분당’이라는 경계지역에 위치한, 곳이었고, 비교적 분당에서 저가의 빌라단지와 정부의 공공임대주택이 병존하는 공간이었다. ‘성남’과 ‘분당’은 이른바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개념으로, 분당이란, 행정적으로 성남시 분당구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분당은 분당구만을, 성남은 분당을 제외한 구시가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어쨌거나 따라서 야탑동에서 학교 학생들이란, 자연히 여러 계층의 자녀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특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그러한 정확히 경계에 위치한 곳이었다. 당시 나의 어머니는 공공임대주택 단지에서의 친구를 경계하셨다. 나는 처음부터 그 묵시적인 위계를 인지하거나 문제시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차츰 내게도 인식되었다.
내가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는, 지금 살고 있는 성남시 수정구 수진2동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 두드러졌다. 이곳은 모란역 바로 옆에 위치한 곳으로, 모란역은 예전에는 성남종합버스터미널이 있던 장소이자, 모란장이 열리던 곳으로 차가 없던 우리가족이 외가댁에 갈 때나, 엄마를 따라 모란장에 갈 때에 들르던 곳이었는데, 어린 시절 내게는 복잡하고 더럽고 덥고 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쨌거나 그런 모란역에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이곳을 이사를 간 후 한동안, 사람들에게 내가 사는 지역을 비밀로 부쳤었다. 누군가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저기에~' 산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무렵 ’성남‘에 살던 내 친구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진학한 이후 나의 그런 박탈감과 소외감은 더 심해져만 갔다. 나는 분당의 어느 부유한 동네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박탈감과 소외감을 더 심하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내가 내 기억 속에서 꿈꾸던 나의 노스텔지어와 유토피아가 존재하던 공간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게 된 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한동안 삼십분 거리의 버스에서 종종 혼자서 눈물을 훔쳐야했다. 나는 그렇게 초등학교에서 저소득층 자녀로 배급받은 우유를 탄천 냇가에 버리고 오고, 엄마가 어디서 주워온 교복을 입고, 다 찢어져서 실로 꿰멘 바지 무릎 부분을 애써 가리고, 키가 커서 칠부바지가 된 바지가 창피해서 애써 똥싼 바지처럼 바지를 내리고 다녀야 했다. 썸씽을 가지던 여자아이에게도 내가 사는 곳을 창피해서 숨기고, 브랜드 교복이 아닌 것이 창피해서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조마조마하며,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2004년 11월 5일, 내 일기장에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며, 지금과 같이 나의 성장에 대한, 나의 트라우마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가 적혀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일기장을 보면서 다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스물다섯 살, 내 자전적 기록이다. 그리고 그 고등학생 이후로의 나의 에세이는 아직은 없다. 나는 2002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 올해로 10년째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 이후의 내 삶이란, 그 언덕 제일 꼭대기에서의 삶을 인정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언덕 높이 솟아오른 이 공간, 할머니가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오르내리는 이 공간, 밤마다 주정과 싸우는 소리가 골목골목에 울려 퍼지는 이 공간에 불행하게도 애착을 느끼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스물다섯 해를 살면서,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서현역 분당 상업단지의 중심지에서 야탑역, 모란역을 하나씩 거치면서 그 중심지에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내 삶을 경험하면서, 내가 배운 것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낙오하는 풍경이었고, 불평등이 재생산되고 영유화되는 풍경이었다. 배제를 추동하는 도시와 자본논리, 여전히 IMF로 실직된 것은 당신의 잘못일 뿐,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아버지 밑에서, 내가 보고 경험하고 배운 것은, 결국 그것이었다. 길게 돌아왔지만, 공간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은, 결국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