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누군가에게 써 주었던 글의 일부를 또 다시 발췌함.

   결국 개성이라는 기만적인 찬사는 주체를 그저 소비의 주체로서 호명할 뿐이다. 소비함으로 만족하는 이들에게 물질적 풍요와 그 화려함은 허위를 가리기 위한 매춘부의 밀어에 불과하다. 매춘부는 저마다의 귀에 애무를 하고 그것으로 소비사회의 노예들은 만족하고 노예의 쇠사슬은 은폐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예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적합한’ 소비도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며, 그 어떤 취향도 그 자신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소비는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불면증에 걸린 삶처럼, 이 세계를 부유할 수 없는 것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과 공간을 자의적으로 편재함으로써 그것을 통일하고 시간성을 질식시킨다. 이에 대해서는 드보르의 탁월한 해석을 그대로 인용하고 싶지만 지면 문제 상 접어두기로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불면하는 삶에 대해서는, 1936년,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강박증에 걸려, 공장 톱니바퀴를 쉬지 않고 돌리는 환상을 겪는 것을 떠올리면 좋다. 그처럼 불면하는 삶은 시간의 개념이 삭제되고 끝이 없이 현재는 영원히 존속한다. -

   나는 여기서 자본주의에서의 삶을 그 불면하는 삶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당당히 그렇다고 말해야 하겠다. 현대사회는 마치 성찰을 잃은 듯이 맹목적으로 전진하고 있다. 옛것은 단지 향수나 추억으로 남을 뿐이고, 모두는 결코 우리가 마주할 수 없는 미래라는 것을 향해 런닝머신 위를 경쟁하듯 달려간다. 하지만 이것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영원한 현재의 지속일 뿐이다. 과거라는 것은 아마도 어느 특이한 사람의 취향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전은 케케묵은 고리타분함으로 전락하였고, 유일하게 우수한 것은 어느 최신작이거나 베스트셀러라고 이르는 역시 최신 흥행작으로 대치되어 버렸다. 사유라는 말 대신, 혁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마치 그것이 우리를 미래와 대면해주리라고 현혹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삶들을 이르러 불면하는 삶이라고 밖에는 다르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무엇이라고 말을 했던가. 불면이란 ‘아무 목적도 없이 깨어 지키고 있는 상태. 여기에 묶여 있는 순간, 시작점과 종착점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 임바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고 하였다. 반면 ‘잠’이란, 사건의 시작과 끝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간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주체가 시작하는 지점, 주체가 탄생하는 지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미래가 타자의 공간임을 생각해보자면, 잠, 즉 시간성의 탄생이라는 것은 동시에 주체의 탄생이자,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이에 대해서 그는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상황 속에, … 새로운 시작을 끌어들이는 것은 밖에서 온 소음뿐이다.’ - 임바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 고 말하는데, 이는 불면의 부유하는 삶에서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밖에서 온 소음’, 즉 외부의 존재자, ‘타자’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