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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상식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지루함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 글은 순전히 필자 개인적 토로이자, 혹시나 이 이야기가 진부하게 들리지 않을 이들을 위한 글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오늘날, 서점가에는 이른바, 경영학, 성공학, 자기계발, 혹은 처세술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 중에서 어떤 이름이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양한 이름으로 일정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편의상 경영학 혹은 경영학 담론이라고 부르겠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배우는 마케팅이론이나 유통, 인사 노무 등에 대한 지식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서점가에 하나의 분야를 형성한 성공학, 자기관리론 등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영학 담론은 사실 서점가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기업에서, 그 밖의 문화산업에서, 하나의 양식을 형성하고, 그 인기를 부단히 누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이 담론을 향유하고 있겠다. 필자의 주변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도 있다. 사실 내 주변에는 이 담론에 열광하는 사람이 무려 둘이나 존재한다. - 아마 제대로 속속들이 파헤쳐 본다면 그 숫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이 이 담론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시각은, 이러한 담론은 ‘실용적’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지식이 꽤 유용하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것이다.
물론, 지식은 유용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유용한 지식은 많으며, 그러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 명제는 매우 명백해보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서점에는 수많은 유용한 책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이른바 실용서적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여행을 가기 전, 여행서적을 읽는다거나, 요리를 위해 요리법에 관한 서적을 읽는다거나, 혹은 어학공부를 위해 어학서적을 읽는 행위는 논쟁의 여지 없이 매우 유용한 일이다. 그러한 책에는 독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며, 그 지식은 그에게 매우 유용한 도움이 된다. 실용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경영학 서적도 과연 그런 실용서적의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과연 경영학 서적들이 실용서적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일까, 혹은 실용적 성격을 지닌 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내가 문제시 하는 첫번째 지점이 도출되었다. 과연 경영학 담론이 지시하는 지식들은 과연 실용적인 지식일까, 혹은 그러한 책들은 실용서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전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이러한 담론들은 그 인기가 지속되는 것에 따라, 진화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단지 경영학이라고 총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야는, 성공학과 처세술에서 자기계발과 자기관리, 인맥관리 등, 그 모습을 조금씩 변화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 나는 이러한 여러 분화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관리’, ‘계발’한다는 점에서 자기경영의 공통적인 속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경영학 담론이라는 지칭을 이끌어 낸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학 담론에서의 지식이 학문적 성격으로서 지식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실용적 성격에서의 지식 조차도 어떤 발전이나 만족할만한 목표달성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경영학 담론에서 제공하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태도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것이 실용적 성격을 지니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부류의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태도, 그리고 이른바 ‘효과적인 자기관리 방법’ 정도뿐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양자의 측면을 완전히 괄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류의 담론을 ‘보수적’이라고 표현한다면, - 물론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중요한 표현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담론을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정치적 프레임을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므로, 이 표현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이 보수적 담론이 적어도 우리에게 그러한 두가지 측면에서 유익한 점이 있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것이 실용적 성격을 도출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장에, 여행서적, 요리서적, 어학서적과 같은 실용서와 비교해보자. 여행서적에서 제공하는 여러 여행정보들은 여행을 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준다. 요리서적과 어학서적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경영학 담론의 서적들도 같은 성격을 지니는가?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실용서적과 경영학 서적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경영학 서적이 실용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용서적과 비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지식이 실용적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그 지식이 즉각적으로 사용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경영학 서적은 실용적인 지식으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시중에는 숱한 경영학 서적과 그 지식이 존재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다. 단지, 시기에 맞는 적당한 유행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한 리더쉽에서 설득의 리더쉽’, ‘자산관리에서 시간관리와 능력관리’, 정도의 유행이 있을 뿐이다. 태도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자 - 성공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 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영학 담론이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지식은 만족할만한 차이점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태도에 대해서라면, 만족스러울 만큼의 성찰성을 제시해준다고 하기 어렵다.
사실, 경영학 담론의 지식은 실용적이라는 문장에는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비실용적이라는 역명제가 도출가능하다. 실용과 비실용의 구분, 경영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구분에는 분명한 대치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 대척점이 내가 문제시하는 두번째 지점이다. - 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분명히 구분하는 입장이지만, 본 글에서 양자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 나는 경영학 담론의 지식은 실용적이고,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비실용적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 역의 대답을 해야한다. 경영학에서의 지식이 실용적이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면,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실용적인가에 대한 대답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대답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실용서적의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대답만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이런 요청에 의해서 실용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그 자체로 실용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수사적인 성격을 줄이기 위해,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도록 하자.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태도 보다는 구체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실용적인지는 이제부터 판단해보자. 이를테면, 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서, 현대금융자본주의에서의 부유하는 투기자본에 대한 공포, 통제불가능한 공포 속에 만연하는 보험산업과 그 실태, 각종 신종전염병에 부과되는 공포와 그것으로 인한 배제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현대사회에서 만연한 공포와 그 이동을 분간할 수가 있게 해준다. 또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사회적 배제의 역사적 접근과 지식이 어떻게 권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배제가 어떻게 어떤 맥락으로 형성이 되며, 배제와 지식, 그리고 권력이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으며, 배제를 추동하는 논리가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이른바 배제된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논리에 의해서 배제되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사례를 들자면, 무궁무진할 것이다.
태도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사회를 분석하는 비판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므로써, 세계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로 관계맺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는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근본적인 자기성찰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 지식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관점들을 제시하므로써, 기존의 상투적 관점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하게 하며, 나아가 실천적, 다시 말해서 실제 적용적, 선택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러한 성찰성은 지극히 실천적, 즉 실제 적용적이며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문제시하는 지점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하는 지점으로, 실용성과 ‘실용주의’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사실, 실용성과 실용주의는 오늘날 정치에서, 담론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그와 함께 범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용성과 실용주의라는 이름 하에 손쉬운 생각과 합리화, 그리고 그 수사에의 찬양을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실용주의에의 그 역사적 기원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용주의라, 한다면, 서양에서는 공리주의의 연장선으로써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실학이라, 하여 민중 민생에의 공헌에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과 서양 모두 실용주의가 정치사상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개인의 이윤에 봉사하는 사상이라기 보다는, 정치,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본래적 의미는 정치사상이지, 개인의 이윤에 대한 변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경영학 담론에서 존재하는 실용주의는 결코 과거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는 속물적 유행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 하에서 오늘날 경영학 담론이 경제학이나 인문학의 흉내를 내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 분명하다.
오늘날, 서점가에는 이른바, 경영학, 성공학, 자기계발, 혹은 처세술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 중에서 어떤 이름이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양한 이름으로 일정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고, 나는 그것을 편의상 경영학 혹은 경영학 담론이라고 부르겠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배우는 마케팅이론이나 유통, 인사 노무 등에 대한 지식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서점가에 하나의 분야를 형성한 성공학, 자기관리론 등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영학 담론은 사실 서점가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기업에서, 그 밖의 문화산업에서, 하나의 양식을 형성하고, 그 인기를 부단히 누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인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이 담론을 향유하고 있겠다. 필자의 주변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도 있다. 사실 내 주변에는 이 담론에 열광하는 사람이 무려 둘이나 존재한다. - 아마 제대로 속속들이 파헤쳐 본다면 그 숫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이 이 담론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시각은, 이러한 담론은 ‘실용적’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지식이 꽤 유용하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것이다.
물론, 지식은 유용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유용한 지식은 많으며, 그러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 명제는 매우 명백해보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서점에는 수많은 유용한 책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이른바 실용서적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여행을 가기 전, 여행서적을 읽는다거나, 요리를 위해 요리법에 관한 서적을 읽는다거나, 혹은 어학공부를 위해 어학서적을 읽는 행위는 논쟁의 여지 없이 매우 유용한 일이다. 그러한 책에는 독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며, 그 지식은 그에게 매우 유용한 도움이 된다. 실용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경영학 서적도 과연 그런 실용서적의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에서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과연 경영학 서적들이 실용서적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일까, 혹은 실용적 성격을 지닌 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내가 문제시 하는 첫번째 지점이 도출되었다. 과연 경영학 담론이 지시하는 지식들은 과연 실용적인 지식일까, 혹은 그러한 책들은 실용서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전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이러한 담론들은 그 인기가 지속되는 것에 따라, 진화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단지 경영학이라고 총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야는, 성공학과 처세술에서 자기계발과 자기관리, 인맥관리 등, 그 모습을 조금씩 변화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 나는 이러한 여러 분화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관리’, ‘계발’한다는 점에서 자기경영의 공통적인 속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경영학 담론이라는 지칭을 이끌어 낸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학 담론에서의 지식이 학문적 성격으로서 지식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실용적 성격에서의 지식 조차도 어떤 발전이나 만족할만한 목표달성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경영학 담론에서 제공하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태도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것이 실용적 성격을 지니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부류의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태도, 그리고 이른바 ‘효과적인 자기관리 방법’ 정도뿐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양자의 측면을 완전히 괄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류의 담론을 ‘보수적’이라고 표현한다면, - 물론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중요한 표현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담론을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정치적 프레임을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므로, 이 표현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이 보수적 담론이 적어도 우리에게 그러한 두가지 측면에서 유익한 점이 있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것이 실용적 성격을 도출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장에, 여행서적, 요리서적, 어학서적과 같은 실용서와 비교해보자. 여행서적에서 제공하는 여러 여행정보들은 여행을 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준다. 요리서적과 어학서적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경영학 담론의 서적들도 같은 성격을 지니는가?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실용서적과 경영학 서적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경영학 서적이 실용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용서적과 비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지식이 실용적 성격을 지녔다고 해서, 그 지식이 즉각적으로 사용되어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경영학 서적은 실용적인 지식으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시중에는 숱한 경영학 서적과 그 지식이 존재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다. 단지, 시기에 맞는 적당한 유행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한 리더쉽에서 설득의 리더쉽’, ‘자산관리에서 시간관리와 능력관리’, 정도의 유행이 있을 뿐이다. 태도의 측면에서 본다면, 더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자 - 성공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 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영학 담론이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지식은 만족할만한 차이점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태도에 대해서라면, 만족스러울 만큼의 성찰성을 제시해준다고 하기 어렵다.
사실, 경영학 담론의 지식은 실용적이라는 문장에는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비실용적이라는 역명제가 도출가능하다. 실용과 비실용의 구분, 경영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구분에는 분명한 대치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 대척점이 내가 문제시하는 두번째 지점이다. - 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분명히 구분하는 입장이지만, 본 글에서 양자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 나는 경영학 담론의 지식은 실용적이고,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비실용적이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 역의 대답을 해야한다. 경영학에서의 지식이 실용적이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면,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실용적인가에 대한 대답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대답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실용서적의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대답만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이런 요청에 의해서 실용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그 자체로 실용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수사적인 성격을 줄이기 위해,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도록 하자.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태도 보다는 구체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실용적인지는 이제부터 판단해보자. 이를테면, 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에서, 현대금융자본주의에서의 부유하는 투기자본에 대한 공포, 통제불가능한 공포 속에 만연하는 보험산업과 그 실태, 각종 신종전염병에 부과되는 공포와 그것으로 인한 배제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현대사회에서 만연한 공포와 그 이동을 분간할 수가 있게 해준다. 또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사회적 배제의 역사적 접근과 지식이 어떻게 권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배제가 어떻게 어떤 맥락으로 형성이 되며, 배제와 지식, 그리고 권력이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으며, 배제를 추동하는 논리가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이른바 배제된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논리에 의해서 배제되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사례를 들자면, 무궁무진할 것이다.
태도의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은 사회를 분석하는 비판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므로써, 세계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로 관계맺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는 인문학, 사회과학의 지식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근본적인 자기성찰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 지식이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관점들을 제시하므로써, 기존의 상투적 관점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하게 하며, 나아가 실천적, 다시 말해서 실제 적용적, 선택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러한 성찰성은 지극히 실천적, 즉 실제 적용적이며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문제시하는 지점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하는 지점으로, 실용성과 ‘실용주의’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사실, 실용성과 실용주의는 오늘날 정치에서, 담론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그와 함께 범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용성과 실용주의라는 이름 하에 손쉬운 생각과 합리화, 그리고 그 수사에의 찬양을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실용주의에의 그 역사적 기원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용주의라, 한다면, 서양에서는 공리주의의 연장선으로써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실학이라, 하여 민중 민생에의 공헌에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과 서양 모두 실용주의가 정치사상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개인의 이윤에 봉사하는 사상이라기 보다는, 정치, 즉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본래적 의미는 정치사상이지, 개인의 이윤에 대한 변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경영학 담론에서 존재하는 실용주의는 결코 과거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는 속물적 유행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 하에서 오늘날 경영학 담론이 경제학이나 인문학의 흉내를 내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