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푸코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없지만, 시간규율이라는 개념은 참 흥미롭다.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시장에서의 일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해보자. 1) 비숙련직 노동 2) 숙련직 노동 3) 자영업 4) 전문직 노동. 이러한 도식대로 살펴보자면, 이른바 시간규율, 즉 시간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지는 것은 1) 비숙련직 노동으로 갈수록 심화되는 반면, 반대로 4) 전문직 노동으로 갈수록 여유로워 진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다소 거친 연결이라도 살펴보자면, 1) 비숙련직 노동으로 갈수록 임노동 관계가 뚜렷해지고, 4) 전문직 노동으로 갈수록 그 개념이 뚜렷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소 모호한 개념인 3) 자영업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임노동 관계가 뚜렷해진다는 말은 한편으로, 노동력 상품화가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노동력 상품화가 이루어져, 더이상 나의 노동력이 나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 될수록, 시간규율이 엄격하고 심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푸코의 권력가설에서 마르크스의 생산관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를 토대로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노동 관계가 노동력이 상품으로 매매되는 것이라면, 이는 자본론에서 지칭하듯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이란, 관리자의 통제 하에 이루어지며, 노동자의 노동생산물, 즉 상품은 노동자의 소유가 아니라 자본가의 소유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소외'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겠다. 노동과정에서의 소외이며,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서 마르크스와 푸코의 본질적인 차이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서의 노동은 마르크스에게는 소외된 노동에 다름아니었다면, 푸코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지, 규율 아래서 소외된 주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푸코에게서 이것은 규율하는 권력과 유순화하는 신체 사이의 전략적 게임이 진행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에게서도 임노동이 단순히 소외인 것만은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임노동이란 소외된 노동임과 동시에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성을 담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