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5일]


학회 내에서 학생운동이나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책임감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제와서 하는 변명으로 비췰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 학생운동가 등으로 단 한번도 호명된 적도 없고, 스스로를 그렇게 호명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내에서의 어떤 인간적인 책임감 마저 회피하려는 속셈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렇다.  

 

물론 나의 이러한 위치지움은 아마 거의 전적으로 내가 삶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다는 것일테다. (자본주의적) 욕심과 (인간 본연의) 욕망을 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욕심이 많다. 너무 많다. 세계에 대한 나의 관조적인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그렇게 삶에 대한 욕심 많은 이면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아마 이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언제인가 제출차 썼던 에세이에서, 자기계발의 모습들은 주체에게 '포기 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구절을 쓴 일이 있다. 나는 이것이 지금 바로 나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욕심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다. 혹자가 사용한 좌파적 자기계발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그다지 공감을 표하지는 않지만, 자기계발이라는 표현은 묘하게도 맥락이 이어져 있다. 

 

간밤에는 읽지도 못할 책들을 꾸역꾸역 담아내고 있는 내 방을 보면서, 생각을 하였다. 내가 혹여 실패하는 때가 온다면, 그것은 필시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라고 말이다. 음울한 나의 자기예언이 공포스럽고,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외인론적 해설에서는 자기실현적 예언에 대해서 지적하는데, 자기예언이란 언제나 무서운 것으로 다가온다. 공포스럽게도.

 

그래서, 마르크스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꿀먹은 벙어리다. 마르크스는 고전일수도, 과학일수도, 그리고 그 과학은 혁명적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일 수도 있을텐데, 나에게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사고와 현상과 행위를 통해서 어떤 고유의 물음을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유무형의 물음은 바로 현재 지금의 이 어.정.쩡.한.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누구고 마르크스는 누구냐. 나는 이 물음들이 어딘가, 메타적인 어떤 고민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그러한 것에 대한 고민을 좋아하면서도, 방만하다. 흔히 은유로 번역하는 Metaphor의 참 뜻은, 머리 속에 떠올려지는 어떤 느낌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한다. 문학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이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메타포, 나는 예수와 마르크스에 대한 어떤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 보면, 매일 시인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던 집배원은 네루다에게 시를 어떻게 쓰는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단 한편의 시를 쓰고서 투사가 되는데, 그는 네루다에게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를 쓰면서, 자신도 이제 메타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소리친다. 바디우가 말하듯 시는 처음부터 진리를 창안하는 것이었고, 메타포는 어딘가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닮아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말하듯 '세계는 현상형태를 기술하는 것'으로 해명될 수 없고,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시를 대중투쟁의 현장에서 낭독한다.

 

결국 나는 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으로 서 있다. 길고 긴 회귀적 물음에 대하여, 나는 답하는 입장이고, 그 평가는 매우 엄격한 과학적 기준에 의거하여 판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