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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2012년 12월 3일]
1.
나는 건실한 한국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 가정에서 스물 다섯해를 보냈다. 나의 어머니는 권사시며, 아버지는 집사이다. 개신교에 대한 나의 가족 전통을 말하자면, 사실 대단하다. 친척 어디로 가도 모두 대단한 개신교 집안이고, 이는 친척 간 교류가 많지 않아, 친척들의 면면을 잘 모르는 나로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단순히 신자인 것을 넘어서서, 기독교 서적을 직접 집필해서 출판하셨던 큰 아버지, 실제로 개척 교회의 목사로 있는 작은 아버지, 또 개척 교회의 목사로 지내고 있는 고모부,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분 역시, 개척교회의 목사, 그리고 그의 아들 딸인 나의 사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중에서 지금 돈이 많아서 강남교회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다들 사업이 망하고 넉넉하지 못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그렇게 충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또 자라왔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 칼뱅파 장로교의 투철한 전통이 지금 나의 경험과 그 경험에 축적된 사상에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것 말이다.
2.
나는 나의 아버지와 쏙 빼닮았다. 요즘은 이상하게 내 생김새가 어머니를 닮았노라고 이야기를 종종 듣지만, 사실 나는 생김새로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골고루 닮았고, 정신적으로는 늘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었다. 언제였을까, 나는 내가 아버지의 분신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사춘기 때였을까, 아니면 요 근래였을까,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오이디푸스였던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무척이나 무서운 분이셨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많이 나이드시고,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아버지는 나에게 무서운 존재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를 많이 혼내셨지만, 아버지가 한번 불같이 화가 나면, 오직 어머니만이 나의 유일한 방패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가나서 나를 혼내자, 어머니가 나를 안고 집밖으로 도망갔던 적이 있다. 종종 그랬던 것 같다. 또 아버지는 가족끼리 어딘가 갈때면, 내 손을 꼭 잡으셨는데, 장난으로 자주 내 손을 아프도록 꽉 잡으셨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강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보수주의셨다. 아니 보수주의시다. 지금도 아버지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의 신봉자이다. 지금도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선거를 하러 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보수주의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사실 보수라는 말도 알지 못하였고, 이회창이, 한나라당이, 그리고 중앙일보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강력한 보수적 관념을 가진 선량한 학생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를 보는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 아버지의 전형이다. 대단히 가부장적이며, 언제나 고장난 것을 수리하고,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드는 것을 즐겨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집안의 수 많은 것들을 직접 만드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왔고, 그것은 내게서 무척이나 당연한 풍경이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고나서는 옥상이 생겨서인지, 옥상에서 아버지가 언제나 뚝딱거리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아버지는 대단한 원칙주의자셨다. 근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좋은 직장에 다니시면서도 직장 내 비리를 묵비하지 못하셨고, 결국 직장을 잃으시게 되시기도 하셨다.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에서도 아버지는 대단한 원칙주의자셨다. 아마도 근본주의 개신교에 가장 알맞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주의는 교회 내에서도 트러블을 많이 일으켰고, 그래서 여전히 장로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하셨다.
아버지의 천직은 출판일이었다. 현재도 그일을 하시면서도 변변한 수입을 벌어오시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다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실직, 혹은 이직을 하셨고, 그과정에서 다양한 일을 하셨지만, 아버지의 천직은 출판일이셨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흑백사진에서, 아버지가 서재 앞에서 찍은 사진을 아버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꿈 많은 분이셨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렇게 회고하신다. 그리고 나도 어렴풋한 기억에서 나의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따금 집에 오실때면, 책 한권씩 들고 오셨다. 퇴근길에 사가지고 오셨던 것이었다. 다 버리고 지금은 많이 남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많은 책을 읽으셨고 그것을 모두 가지고 계셨었다. 지금도 어머니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책이다. 지금도 우리가족 모두가, 나름대로 독서를 즐겨하는 것은 모두 아버지의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회고하시기를, 오래 전 백과사전 전집이 상당한 가격을 누리던 당시, 아버지는 지금도 서재에 꽂혀있는 수십권짜리 백과사전 전집을 무슨 가보처럼 여기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가 백과사전에 녹차를 한방울 흘리자,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나는 사전 찾아보기를 즐겨하던 어릴 적, 아버지의 그 백과사전을 펼쳐보며 놀았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티비에만 빠져지내셨다.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 하셨고, 꿈을 잃은 것 같으시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그 말에 무척이나 와닿았다. 아버지의 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서도. 여전히 아버지는 티비에 빠져사시지만, 사실 요즘들어 아버지가 이따금 책을 한두권씩 들고 오신다. 어떻게 얻게 된 책인지, 사신 것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따금 들고 오셔서 나에게 주시기도 하고, 한동안 아버지 책상에 올려두고 계시기도 하고, 그리고서 다 읽으셨는지 다시 나를 주시기도 한다. 갑자기 괜히 궁금하다. 나의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
3.
나와 아버지가 가장 갈등이 심하였을 때는 아마 고등학생 때와, 스무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개신교 가정에서 금욕적 삶을 충실하시던 당신은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인정하시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모습은 지금도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태생적으로 술도 잘 못마셨고, (그래서 나도 지금 마찬가지지만) 대단히 원칙주의자셨고, 누구보다 성실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놀기보다는 성실하게 공부를 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고, 대학교에 올라가서는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셨다. 아마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의 분신이라는 것을.
내가 아버지의 분신이라는 것을 깨닫자,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강한 척하시지만, 사실은 나처럼 유약하고, 꿈 많고, 외롭고, 눈물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이제는 읽지도 않을 책을 고집스럽게 버리지도 못하게 하고서 붇들고서, 하루 종일 티비만 보시고 계시는 것에서 숨겨진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겪으셨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나보다 강인하고 성실하시며, 나는 여전히 유약하고 눈물 많은 아이일 뿐이다. 아버지는 내가 적대하는 대상, 넘어서지 못하는 대상으로 자리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스물 다섯해 동안 바라본 아버지는, 그토록 가족에게 강인하고, 누구보다 성실하셨지만, 가산은 무너졌고, 사회는 아버지처럼 성실한 가장이 성공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 사회는 성실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내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낙오하는 풍경 뿐이었고,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고, 사회에서 소외되는 어머니와 나의 경험이었다.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게도 성실한 사람들이 낙오하고, 배제되며, 몰락하는 시대에, 금욕적이고 이기적인 주체가 행위하는 공간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오직 그러한 유물론적 행위주체의 공간 뿐이다. 아마 내가 이러한 뼛속까지 근대적 기획으로 가득찬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