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9일]


결국 택배가 도착하였다. 그녀와 헤어지고서 대략 한달만이다. 레닌의 책 두권과 공책 한권, 그리고 체크카드 하나와 분홍색 머리핀, 몇개의 편지들. 이것이 전부였다. (목도리는 결국 잃어버렸나 보다.) 모두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것들. 그녀는 내가 준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주지 못한 편지를 달라던 생각은 이제 잊었나보다. 마치 유물이 도착한 것만 같았다. 반쯤 비에 젖어 변형된 종이에 번진 잉크, 하지만 나는 고증학자가 되는 일을 그만 두기로 하였다.

 

이별을 하는 일이 꼭 다섯번째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박스를 하나씩 만들어 장롱 위에 올려둔다. 기억의 상자이다. 그래서 꼭 다섯개의 상자가 있어야 하지만, 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은 버린다. 어쨌거나 이제 꼬옥 두개의 상자가 생긴 것이다. 상자를 올려두는 일이라니, 중경삼림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거기서도 어느 남자는 나처럼 상자를 만들어 올려두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우리가 써오던 공책의 여백은 채워지지 않은 채 돌아왔다. 아마 내가 그녀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편짓말을 보고, 그녀는 이별로 답장을 해주었던 것이지. 다시 그녀에게서 이 공책에 돌아오면, 무언가 써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역시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제서야 생각난 것이지만, 내가 그녀에게서 공책을 전해주고서, 그녀는 내게 이별이라는 답장을 전해준 것이 아니던가. 사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었겠지.

 

어쨌거나 고증학자는 없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기억을 숭고한 것인양 고증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무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후회는 별로 남지 않는다. 이제는 그런건 별로 없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 이별은 내게 항거불가능한 것이고,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를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또 새 사람이 찾아오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