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 문득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읽고 싶다. 잠들지 않는 냉철한 사유가 아니라, 잠에 대한 철학을 하고 싶다. 불면의 이 도시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이 시각까지 내가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의 광인(狂人)’을 맞이하고자 함이던가. 나는 글을 쓴다.

   자본주의의 도시는 시간을 잊은 지 오래다
. 한밤중에 문을 열어서 장사가 될 리 없다던 사람들의 조롱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편의점의 불빛은 하루 24시간을 넘어서, 25시간의 편리함[convenience]을 도시의 구석구석 선사하고 있다. 도시마다 자리 잡고 있는 소비의 거리들에서는 깊은 새벽까지 술집과 카페, 패스트푸드, 식당들, 그밖에 DVD, PC, 노래방, 등등의 각종 들이 성업하고 있다. 매일 일찍 문을 닫는다고 불평을 하는 은행은 닫힌 문을 뒤로하고 휴대폰, PC, 노트북, 등 각종 멀티디바이스를 통해서 휴식 없이 화폐를 유통한다.

   이것은 얼마 전
, 내가 겪은 일이다. 지하철이 끊기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기 위해, 심야버스를 타러 서울의 한 역 근처를 배회한 적이 있다. 그때는 새벽 1시가 가까워가고 있었고, 나는 목이 너무 말라서, 버스가 오기 전, 음료수를 사 마시기 위해 편의점을 찾고 있었다. 주변이 무척 부산하고 시끄러웠는데, 왜 그런가했더니, 아니라 다를까 그 시각에 거리 화장품가게에서 영업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르바이트를 고용하여 판촉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게 앞에서 분홍색으로 치장된 옷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은 한밤 중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일어와 한국어를 번갈아가며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그렇다
, 이 도시에 밤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는 이미 현대인의 가슴 속에 박혀있는 가장 중요한 테제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표준화된 생애과정을 따라서 쉼 없이 경쟁하고 있고, 신용제도는 오늘과 내일의 구분을 헐어버리고, 내일의 소비를 오늘로 앞당기고 오늘의 만족을 기꺼이 내일로 유보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의 도시가 아니라 시간이 거세된 도시, 진정으로 잠을 잃어버린 도시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의 한 신문사 칼럼을 떠올린다
. ‘휴일에도 정상영업 합니다.’ 하지만 칼럼에서 필자는 반문한다. 휴일에 정상영업을 하는 것이 정상인가, 아니면 휴일에는 휴식을 하는 것이 정상인가(!), 라고 말이다.1) 불면의 도시가 숨기고 있는 진실은 간단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24시간의 편리함의 가게[convenience store]의 이면은 24시간 노동하는 교대제 노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심야버스의 진실은 하루 21시간을 근무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것2)이고, 자본축적의 신화는 공장 옆에서 기숙생활을 하며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체크되는 2교대의 하청 노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자동차 부품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주장을 떠올리자.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 “잠에는 잠 좀 자자.”3), 이것이야 말로 불면의 도시에서 아우성치는 존재의 함성이다.

   다시 레비나스로 되돌아가 보자
. 그에게 있어서, 잠은 존재를 비로소 주체로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잠이라는 것을 우리가 ()’라고 할 수 있다면, 불면증이야 말로, ‘없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생성과 소멸의 가능성조차도 기각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불면의 상태에는 시작도 끝도 있을 수 없다. 반면 잠이야말로, 존재에게 있어서 어떤 다른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지정해주는 것이다. 잠은 이제 시간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오늘과 내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게 인간 실존이 시간성에 귀속된 것이었다면, 레비나스에게 잠이란 그 실존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지시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에게 내일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다
. 우리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타자에 대한 것과도 일치한다. 타자는 미래처럼 죽음처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대상이며, 따라서 그 대상과는 어떤 경험도 공유될 수가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대상은 결코 타자로서 가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타자와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le face à face)‘일 뿐이다. 그리고 존재가 마주보는 타자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 낯선 자이자, ’이방인‘, ’여성적인 것(le féminin)'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존재이다.

   정리하자면
, 존재가 시간성을 획득하고 주체로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마주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는 마주봄을 통해서 나와는 동일성을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신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비대칭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윤리학이란, 우리가 그 타자와의 마주봄을 전제로, 헤겔(Georg Wilhelm Friedch Hegel, 1770-1831)이 제공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제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불면의 도시에서 부유하는 광인과 마주할 여지를 주었다.

   불면의 도시는 다름 아니라
, 시간을 금으로 계산하는 소비의 왕국이다. 불면의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정신병이란, 소비주의라는 이름의 페티시즘(fetishism)이었다. 맑스(Karl Marx, 1818-1883)가 이야기하는 사물화 경향이란, 존재가 타자와의 대면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세계의 주인으로 행사하며 무엇이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행위일 따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소외를 거부하는 일이 노동자가 진짜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하는 일이듯이, 불면의 도시에서 모든 전등을 끄고 잠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도시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노동하는 타자, 나아가, 낯선 이, 이방인, 여성과 장애인, 노인과 어린 아이를 직시하고 주체로서 실존하는 일인 것이다.


   각주


   1) 한겨레 인터넷판
, 2012118일자, 칼럼 “[왜냐면] 재벌 유통업체의 설날 정상영업무엇이 정상인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15312.html
   2) 미디어오늘 인터넷판
, 20111014일자, “삼화고속 파업, 언제까지 시민들 불편 타령만 할 건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861
   3) 참세상, 201225일자, “밤에는 잠 좀 자자,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4880

   참고자료


   임마누엘 레비나스 저
, 강영안 역,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09
   서동욱 저
, 철학 연습, 반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