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레디앙에 기고된 기본소득론 비판과 반박문을 읽고서 간략히 메모하기 위함이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기본소득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읽고서 진전된 형태로 글을 쓰기를 기약하기로 하자.


해당 기고문은 다음과 같다. 남종석이 따로 페이스북을 통해 사적으로 올린 반론도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주소를 밝히지 않겠다.


남종석,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 - ‘기본소득론’ 비판 ①」 

(http://www.redian.org/archive/58740)

남종석, 「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 - ‘기본소득론’ 비판 ⓶」 

(http://www.redian.org/archive/58785)

박정훈, 「기본소득 공부합시다! - 남종석씨의 <기본소득론 비판>에 대한 반론」

(http://www.redian.org/archive/59104)


□ 사실 나는 거의 남종석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이다. 먼저 남종석은 아주 현대경제학적 수사로서, 기본소득론이 현실화되었을 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두 번째 글에서는 기본소득론이 전혀 마르크스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 박정훈은 논리가 일관적이지 않고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 사이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정치적 입장도 부재하고 경제학적으로 엄밀성도 부족하다고 지적하는데,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오히려 박정훈의 입장이야 말로, 경제적 논리와 정치적 입장이 혼재되어 있는 채로 서술하고 있고, 남종석은 두 체계를 일관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남종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간단한 반론으로, 경제위기를 염려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며, 균형이 아니라 위기를 말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적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남종석이 강박적으로 반대한다고 박정훈은 말하지만, 진실로 강박은 박정훈에게 있는듯하다. 열심히 활동하는 인물을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강박적으로 기본소득론은 변론하고 있다.


□ 사실 문제는 아주 보수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박정훈에게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경제학적 논리와 정치적 입장 사이의 통일 문제이다. 그가 이들을 혼재한 채 설명하는 태도는,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고는 하는데, 당위와 현상 사이의 구분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장 발본적으로 비판하자면 자본주의가 망해야하는 것과,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라고도 할 수 있다. 박정훈은 남종석이 우려한 한국경제의 붕괴를 두고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라면 어떻겠냐고 반문하는데, 남종석이 지적하듯 유토피아론일 뿐이다.


□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때때로 현대경제학을 경시한다. 나는 현대경제학을 공부하는 인물인터라, 현대경제학을 경시하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남종석이 따로 페이스북에서 지적한 바지만, 현대경제학이 막강한 이유는 그것이 가지는 현실설명력 때문이다. 현대경제학은 막강한 현실설명력, 계량화를 통한 실용성, 그리고 일반균형 분석을 통한 논리적 체계성과 엄밀성을 가지고 있다.


□ 기본소득론에 대한 노동유인 정도에 대한 문제가 쟁점화 되었는데, 이는 다분히 기술적인 문제일테지만, 당연히 현재의 노동유인책은 노동유인이 양인 경우가 있고, 음인 경우가 있을 것이다. 또 기본소득이 실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박정훈은 기본소득론이 마치 절대적으로 개인에게 노동유인을 제공할 가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듯이 말하거나 또는 임금노동에 유인되는 문제가 사회주의 실현에 뭐 그리 중요하냐는 듯이 말한다. (그는 임금노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낭만적인 수사에 다름 아니다.


□ 박정훈은 남종석이 기본소득론, 나아가 강남훈이나 곽노완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단정짓는다. 본 글이 보다 진전될 수 없는 것은 사실, 기본소득론에 대하여 이해된 후의 글이 아니라, 단지 박정훈의 변호글을 읽고서 쓴 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강남훈이나 곽노완이 정확히 무어라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종석이 그들의 글을 불철저하게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일련의 글들을 읽는데 있어서, 별로 읽을 만한 것이 못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곽노완이 직접 나섰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무엇도 읽지 않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과학과 그럴듯한 소설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소설로서 라면, 물가가 오르고 있다는 지표 하나만으로 인플레이션을 진단할 수도 있고, 디플레이션을 진단할 수도 있다. 또 경제가 성장한다고 진단할 수도 있고, 경제위기라고 진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 다만 한 가지 보유가 있다. 남종석은 평소에 당면의 문제로 생산성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자 계급 연대를 훼손하는 조건으로서의 노동자 사이에서의 격차를 축소하는 두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비판은 유효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남종석이 제시한 그러한 노동자 사이에서의 격차를 축소하려는 시도로서 출발된 것이라는 점이다.


□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적으로 말하자면, 카드회사를 두고서, 미래수입에 대한 수탈자로 규정을 짓는 모습이 보이는데, 카드회사는 이자의 일부를 배당받는 현금유통에 대한 중개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