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나에 대해서 관찰해왔다. 그것은 줄곧 일기를 통해서 진행되었고, 나는 내가 어떤 불안한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쳤고, 때로는 현대적인 용어법으로 그것을 저장강박증이라고 명명하였지만, 어느날 나는 그것의 근저로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서 나의 명명은 한동안 중단되었는데, 오늘은 그것의 해석으로서 몇가지 살을 붙여야겠다. 나의 신경증에 대하여 말이다.


프로이트 혹은 라캉은 주체가 생성되는 과정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아가 아버지의 등장으로 어머니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원하고, 아버지에게는 남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는다. 여기서 동일시의 자아가 분열을 겪고서 진정한 주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 뿐이다.


바로 여기서 나의 문제를 발견한다. 나는 일전에 썼듯이, 내가 사실 갈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나의 외로움의 기제는) 타자, 미래, 성차가 아니라, 자아, 현재, 동일성이고, 내가 하는 것은 결국 독백일 수밖에 없다. 즉 나는 거울단계에 빠져있고, 또한 내가 느끼는 애착감도 결국 자기동일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어릴때부터 잘울고, 감수성만 풍부한 아이였고, 포경도 수능도 군대도 이제는 취업도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남자 혹은 성인, 또는 사람이 되지 못한 인물로서, 말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주체가 온전히 되지 못한, 신경증 환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느끼는 불안과 강박은 사실 바로 여기서부터 기인했던 것이다. 불안과 강박은 결국 같은 기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데,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불안은 어떤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시간만 흐를때 느끼는 나의 초조함, 또는 실수한 기억을 회상하므로서 나타나는 초조함으로, 결국 아버지처럼 되지 못한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고, 강박 역시, 성실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자란 나로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나타나는 기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