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익히 알다시피, 이른바 고전경제학에서 설정하였던 가치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이론, 또 현대경제학에서 그 가치이론을 송두리째 폐기하고 대체시킨 가격이론에 대해서, 얼마간 알고 있을 것이다. 고전경제학은 노동이라는 가치의 원인이자 척도 위에서 가치와 가격, 때로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간극을 일관된 방식으로 풀고자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가치논쟁에 대한 종착점(이자, 시발점)으로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이론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이론의 형태로 발전시켜 화답하였다.


하지만 현대경제학은 객관주의적 가치이론을 송두리째 부정하였고, 효용과 가격으로 표현되는 주관주의적 가치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고전경제학의 속류적 성격들에 의하여 그 전통을 전유되기도 하였다. 또 주관주의 가치이론의 주요한 이론가였던 뵘 바베크에 의해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공격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른바 전형논쟁이라 불리는 끝나지 않는 논쟁을 열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 글에서 나는 고전파와 마르크스 사이를 가르는 가치이론의 그 어떤 쟁점도, 또한 이른바 전형논쟁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내용도 쓰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심지어 현재로서 나에게는 역부족이다.


본 글은 마르크스의 가격이론과 현대경제학에서의 가격이론을 간단하게나마 비교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마르크스의 가치(가격)이론은 이른바, 사용가치와 가치로 구분된 이후 가치가 가격으로 전형되고, 이것이 종국으로 시장가격으로 이어오는 과정을 나타낸다. 특히 투입된 총투하자본으로 규정되는 비용가격과 이 비용가격에서 평균이윤율을 더한 생산가격, 그리고 시장에서의 수요공급에 따라 변하는 시장가격으로 그 가격형태가 전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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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때 평균이윤율은 자본 간의 경쟁을 통해서 형성이 될 수 있는데, 말하자면 경쟁자본주의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현대경제학의 완전경쟁시장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만일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하나의 가정으로서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완전경쟁시장에서 개별기업의 이윤은 0이고, 따라서 이윤율도 0이다. 이때의 상황을 마르크스는 평균이윤율이 형성된 상황, 다시 말해서 생산가격에 상품이 거래되는 상황이라고 상정한다(생산가격에 대해서는 윤소영의 어느 글에선가에서 참고). 즉, 현대경제학은 이윤율이 0인 완전경쟁시장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상황이라고 상정하는데, 이때의 평균이윤율은 0보다 크고(정확히는 크거나 같고), 따라서 시장에서의 거래(즉 실현)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더 부연하자면 완전경쟁시장에서의 이윤율은 시장이윤율이 0일뿐, 평균이윤율이 0이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작동과 시장이윤율이 0인 상황은 양립할 수 있다. (이때 나는 『자본』이 시장가격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생산가격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고 간주한 채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구심이 나타난다. (ⅰ-1) 하나는 뒤메닐 등이 검증하는 이윤율 추이라는 것은 생산가격 차원에서의 평균이윤율의 추이인가, 시장가격 차원에서의 시장이윤율의 추이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뒤메닐 등의 작업에서처럼) 관찰한 것이 시장이윤율이라면, 그것은 평균이윤율이란 경험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불편한 대답이 도출된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나로서는, 이윤율의 문제가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경제학’은 경험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ⅰ-2) 두 번째로, 만일 시장가격이 생산가격에 외생적(?) 시장변동(ν)를 더한 것이라고 본다면, ν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시장가격=비용가격+평균이윤율+ν) 나는 이 정확히 무어라고 명명해야할지 난감한 이 미지수를, ν라고 단순하게 부를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절의 질문의 한 부분으로서 이야기 될 것인데, 나는 ν가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독과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다.


(ⅱ) 독점자본주의의 문제가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이해도가 부족하지만, 스위지나 김성구 등의 글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한 것을 토대로 글을 써나갈 것이다. 우리는 현대경제사를 확인해 볼 때, (직접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현대경제학의 이상대로 완전경쟁시장의 정의로운 상태(실제로 완전경쟁시장이 된다면, 그것은 진실로 정의로울지 모른다!)로 수렴되기보다, 오히려 종속과 독점이 심화/강화되고 있는 과정을 보아왔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은 독점자본주의의 시대를 전제하기보다는, 경쟁자본주의를 전제하고 있고, 독점자본주의의 상황을 설명할 도구로서 난망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레닌과 그 이후의 작업들이 그것을 보충하고 있(다고 한)다. 이때, 독점자본주의는 소수의 기업이 특별잉여가치를 얻어내지만, 이윤율 저하가 여전히 관철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자본』과 함께 스위지의 것을 독해하고 얻어낸 것들인데, 공교롭게도 나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우선 글을 더 진행해보도록 하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독점의 상황은 현대경제학의 언어로는 과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현대경제학에서 과점시장의 가장 단순한 모형인 크루노(Cournot) 모형을 통해서 번역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크루노 모형에서, 복수의 기업이 보이는 행태는 완전경쟁시장에서 기업의 행태와는 다르다. 만일 완전경쟁시장에서 복수의 생산자간 생산성의 차이를 보인다면, 그 경쟁에서 도태된 기업의 생산량은 0가 되며, 반대로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은 생산량이 ∞(무한대)가 된다. 하지만 과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기업 간 상품이 동일한 가격을 가정했을 경우) 복수의 생산자는 저마다 상대 생산자의 Best Response(이하 BR)에 따라 자신의 BR을 결정한다. 즉 최적 생산량을 결정한다. 이 경우 완전경쟁시장에서와 달라진 점은, 생산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도태되지 않으며, 일정한 생산량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점유하고, 시장지배력을 가진 기업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rent - 마르크스의 차액지대(Differential rent)가 아니다 - 를 얻어낸다는 점이다. 이때 rent의 정도는 시장지배력에 따라 비례하여 주어진다.


이때,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ⅱ-1) 하나는 rent를 ‘특별잉여가치’라고 번역해 볼 수 있겠다는 점이다. 만일 완전경쟁시장에서 이윤은 0이고, 과점시장에서의 이윤을 순수하게 rent라고 해석한다면, 동시에 앞서 명명한 ν를 rent라고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과도한 해석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결론이 도출된 이유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그것은 앞서 우리가 경쟁자본주의의 상황을 완전경쟁시장으로 등치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따라 암암리에 ν를 양수라고 규정해버렸는데, 이에 따라 시장변동을 의미하는 ν가, 특별잉여가치 또는 rent라고 번역되는 일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암암리에 이루어진 규정은 한편으로 ‘실현공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마저 숨어있는 것이었다. 실현공황이 없다고 서술한 이유는 시장가격이 생산가격보다 낮게 팔릴 수 있다는 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즉 ν는 음수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이와 같이 마르크스의 언어가 변형되고 뒤틀린 이유는, 현대경제학의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는 현대경제학의 전제들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균형을 포기하지 않았다.


(ⅱ-2) 두 번째로 우리는 쿠르노 모형에서 Deadweight loss(이하 DWL)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즉, (독)과점의 상황에서 생겨나는 손실이 있고, 그것은 기필코 이윤율 저하의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DWL의 존재와 이윤율 저하 법칙 사이의 그 관련성은 일정부분은 모호하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스위지의 말을 들어보자.


“개별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경쟁에서 독점으로의 이행은 이윤의 증가를 가져오며, 사실 이것이 독점의 목적 전부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력에 의해 생산되는 총 가치는 독점의 형성에 의해서는 결코 증가되지 않는다. 따라서 독점기업이 추가로 얻는 초과이윤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소득에서 그 독점기업으로 이전된 가치라는 성격을 갖는다”(스위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필맥, p.380)


즉, 과점의 상황에서 개별기업이 rent(즉 특별잉여가치)를 얻어낼 지라도,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윤율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고, 과점기업이 얻어낸 rent는 다른 경쟁기업으로부터 이전된 것, 혹은 경쟁기업과 분배하지 않고 독식하는 이유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스위지(또는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점 상황에서 오히려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까지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우리는 DWL로 표현하였다. 다시 스위지의 말을 인용하도록 하자.


“사회의 총 잉여가치는 그 모태인 총 사회적 자본의 구성부분 각각의 크기에 상응하는 수많은 조각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큰 조각일수록 축적되는 비율이 높다. 그런데 생산의 집중은 잉여가치 조각의 수를 줄이고 각 조각의 크기를 키우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주어진 총 잉여가치 가운데 축적되는 비율을 효과를 낸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독점은 규모가 작은 자본에서 규모가 큰 자본으로 잉여가치를 이전시킴으로써 그러한 효과를 더욱 촉진시킨다.”(스위지, 앞의 책, p.383)


여기서 조각이라는 비유적 표현이 상당히 거슬리기는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 기업 혹은 특정 기업들의 집합으로서 기업군(群; set)이라고 애둘러 정의하도록 하자. 마르크스의 전형적인 논의에 따르면 자본축적이 고도화될수록, (정확하게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될수록) 이윤율은 하락한다. 그런데 (독)과점으로 인하여, 기업은 자본축적이 고도화되고, 따라서 이윤율 하락이 관철된다는 것이다. 즉, (독)과점으로 인하여, 평균이윤율 형성에 교란이 주어졌을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점시장에서의 이윤율 하락 메커니즘에 DWL은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 명백하게 마르크스는 DWL의 존재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쟁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기획 안에서, DWL의 존재는 인지될 수 없다. 또한 DWL를 전혀 경유하지 않고도 이윤율 저하 법칙이 관철된다. 그렇다면, 독점자본주의(과점시장)에서 DWL은 어떤 역할을 해내는가. 마르크스의 이윤율 공식을 잠시 살펴보자.


p'=s/(c+v)=(s/v)/(1+c/v)


이 ‘소박한’ 공식에 따르면, 이윤율(rate of profit; p')은 착취율(s/v)와 자본구성비(c/v)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이윤율이 저하되는 때는, Δ착취율(Δs/v)보다 Δ자본구성비(Δc/v)가 더 클 때이다. (나는 여전히 실현문제를 등한시 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당연, 자본구성비의 증가인데, 자본구성비의 증가가 만일 시장지배력을 높이는 것이라면, DWL은 자본구성비가 커질 때, s의 크기를 줄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ⅱ-3) 그런데 v가 불변일 때, s가 줄어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착취도를 낮춘다는 해석이 도출된다. 즉, (애시 당초 자본구성비가 증가한다고 해서 시장지배력이 커지는, 즉 독점이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과점시장이 착취도를 낮춘다고 해석되어 버린다. 물론 이것은 한 가지 전제를 품고 있는 것이다. 즉, 착취도는 사전적으로 주어진 상태에서 자본구성비가 증가하였을 때, DWL에 의하여 착취도가 다음 시점에서 하락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강도 증가를 수반하지 않는 기술이 도입된 경우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미시경제학을 들먹거려야겠다. 편의상 그래프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완전경쟁시장에서 균형가격과 균형생산량은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을 기준으로 생산자잉여와 소비자잉여가 양분된다. DWL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독점시장에서는 - 우리는 과점시장을 논의의 중심으로 두고 시작하였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독점시장을 가정하도록 하자 - 아시다시피, 생산량은 한계비용곡선과 한계공급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며, 가격은 한계비용곡선과 한계공급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수요곡선이 위치한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즉, 공급량은 줄고 가격은 올라간다. 이때 소비자잉여는 축소되며, (독점이윤을 포함한) 생산자잉여는 증가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DWL의 존재로 사회후생은 감소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할 것은 생산자잉여가 증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착취도 감소를 설명할만한 일정한 개연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물론 실제로 임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노동조합의 존재(와 그 역량)의 문제이지만, 독점기업의 생산자잉여의 증대는 착취도 감소를 감내할 여력을 제공해준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노동경제학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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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가격이론을 중심으로 『자본』에 기초하여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대경제학에서의 이론을 비교(또는 번역)해가며 독해해왔다. (ⅰ)에서는 마르크스의 경쟁자본주의와 현대경제학의 완전경쟁시장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 채, (ⅰ-1) 평균이윤율과 시장이윤율 사이의 관계, (ⅰ-2) 시장이윤율을 구성하는 요인으로서 ν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ⅱ)에서는 마르크스주의경제학의 독점자본주의와 현대경제학의 (독)과점시장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 채, (ⅱ-1) rent와 특별잉여가치, 그리고 ν의 의미, (ⅱ-2) 마르크스주의경제학에서 DWL을 도입했을 때의 의미, (ⅱ-3) 독점자본주의 이론에서 DWL을 도입했을 때 나타나는 착취도 하락의 해석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대경제학 사이를 비교번역하며 독해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다분히 개인적으로 실천한 것으로서, 오독과 오역의 여지가 즐비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 오독과 오역의 산물에 대하여 누군가 감수해주기를 희망한다.) 특히나 ν에 대한 설정은 다분히 억지스러웠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것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노력이 가지는 이면은 사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대적 수사로 세련되게 만들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욕망은 윤소영 교수의 작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최근에 독점자본주의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나마 읽었던, 김성구 교수와 스위지의 저작은 내게 일정한 교정을 제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