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본가의 임금론』이라는 책이 있다. 부제는 무려, "진보주의 그 궤변에 대한 경고"이다. 황정희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태을출판사이라는 (심지어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심지어 추천사는 자유기업센터 공병호 소장이다). 그런데 검색해보니,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조금은 인기 있는 책인 것 같다. 딱 보아도, 주식투자나 공부해보고, 이상한 경제 논설문을 보며 공감하면서, 자기계발에 매진할 것 같은, 답안 나오는 사람들, 말이다.


대충 읽어 보았다. 200~300 페이지는 되는 책인데, 속독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10~20분만에 다 읽었으니, 그냥 술술 훑어보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뒤로 갈수록 더 하다. 그러므로 나의 이 불성실한 독서노트를 읽고서 어느 보수주의자가 내게 무어라고 말하든 관심 없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왜 빌려 읽어보았는가. ‘자본가의 임금론’이라는 그 발칙한 제목에서 학설사적인 관심 혹은 자유주의 욕망에 대한 내재적 이해랄까, 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 내용은 적어도 절반정도는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내용이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는 내용을 재확인하였다.


서론을 제외한 글의 구성은 세 가지 정도로 구분될 것이다. 첫째는 자유주의 이념, 둘째는 주류경제학적 논리, 셋째는 개인적인 고민이다. 셋째는 두세 줄 이면 끝날 내용이고, 결론은 딱히 없다. 그리고 이 글은 이 책을 읽고서 페이스북에 끄적거린 것을 일부 수정하여 글다운 글로 만든 것이다. 사실 겨우 이런 책을 읽고서 이렇게 길게 써내려갔다는 것이 다소 수치스럽다.


2.


책의 처음과 끝, (그리고 물론 중간중간에도)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가치’이다. (그의 용례에 따르면 이것은 진리 정도의 낱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고로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신의 처지에 따라 그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빈민이 부자의 돈을 떼어내서 자신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 자체를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듯하다. 특히나 그는 자신이 비록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이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자유주의 이념의 서곡을 알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이념의 본질은 경제와 의식의 분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처지와 무관한 지고지순한 진리를 항변한다. (그러한 모습이 사실 대단히 희극적으로 보였지만.)


그가 싸우는 최고의 상대 중 하나는 노동가치론자들이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의 댓가도 노동력의 댓가도 노동력 재생산 비용도 아니라고 답한다. 대신에 자기선택권을 양도함으로써 얻는 이자라고 주장한다. 그저 학설사적으로 흥미로웠고, 사실 그래서 빌린 책인데, 임금론에 대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스미스와 밀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밀로부터는 노동을 이자로 환원하는 것과 유사했고, 스미스로부터는 지배노동가치설에 입각한 해석이었으나, 그는 철저히 노동가치론자를 명시적으로 강박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의 노동가치론자의 유산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자본가의 임금이라는 말을 창작하면서 자본가의 임금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길게 서술하였는데, (대개 위험부담에 따른 비용 같은 것들이다.) 이는 사실 자가당착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 따르면 임금은 자기선택권을 양도함으로서 받는 이자인데, 자본가는 자신의 선택권을 양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표현을 자본가의 소득 정도로 바꾸어보면 오류가 정정이 되는데, 이 역시 문제이다. 왜냐하면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소득(잉여가치)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허구와 싸우고 있다는 점도 안쓰럽지만, 그는 경제학 사회과학이 사실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의 설명은 사실, ‘부는 노동의 대가’라는 고전적 부르주아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는 이러한 논리 대신에 ‘부의 원천은 부’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부는 노동의 대가’가 고전적 부르주아의 논리였다면, ‘부의 원천은 부’는 사실 현대의 부르주아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변화는 ‘자본가의 임금’이라는, 다시 말해서 자본가도 ‘나름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고전적 부르주아의 논리에 대한 변용을 투과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양자의 매개인 것이다. 결국 그는 자유주의 이념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3.


사실 그가 놀라운 것은 자신이 강박적으로 맑스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주류경제학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류경제학의 매우 기초적인 개념들까지도 전부 비판하는데, 아무래도 그는 또 한명의 맑스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먼저 미시경제학을 비판하면서 완전경쟁시장이 아니라 독점을 찬양하는데, (장의 제목이 ‘독점은 위대하다’이다) 읽어보면, 그냥 경제학원론 책을 들려주고 싶다. 완전경쟁시장과 독점 사이의 개념 구분 자체가 안 되어 있다. 독점을 비판하면서 완전경쟁시장을 가정하고, 완전경쟁시장을 비판하면서 독점을 가정한다.


그는 주류 거시경제학을 얼치기 이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시 주류 거시경제학을 대안으로 내놓는다. (그는 대안적 이론이라고 이것을 소개한다.) 수요견인형 인플레이션을 비판하면서 비용인상형 인플레이션 이론을 내놓는데, 일단 이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주류이론이면서, 그리고 이건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이니, 인플레이션 자체가 수요견인인 경우가 있고, 비용인상인 경우가 있는 것인데, 그가 보기에 이것은 이론이 선험적으로 존재하여 양자택일해야하는 문제인 줄로 아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정부정책의 무용성을 주장하면서 프리드먼을 원용한다. 말하자면 그는 인플레이션에 있어서는 비용인상형 인플레이션을 주장하면서, (사실 이러한 주장의 이유는 명백하다. 요즘도 경제지에 손쉽게 발견하듯이, 임금이 오르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므로 임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정부정책의 무용성을 주장하면서, 부르주아의 이득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분히 취사선택적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대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유주의 혹은 자본가중심주의적 사고의 틀을 완성한다. 자본가중심주의에 지주계급은 무용하기 때문이다. 지대 개념을 비판하며 그는 이른바 경제학에서 이용되는 기본적인 생산요소를 부정하고, 자신만이 새로운 생산요소를 수립한다. 자본-노동-지대는 그에 따르면 자본-인간-위치로 정정되어야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담함도 흥미롭지만, 서술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고전파의 차액지대와 현대경제학의 지대 사이의 개념 혼동이 있다.


4.


사실 이런 글은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 이것은 그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글을 읽을 때면 항상 궁금하다. 과연 어떻게 독해하면 이렇게 독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성실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그를 성실하게 독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사실관계에서부터 틀리기 때문이다.) 성실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사실 마르크스를 거론할 필요는 없다. 그는 슘페터나 여러 학자들을 간간히 언급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가 이러저러한 책을 나름대로 독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독해를 하면, 이렇게 독해할 수 있는가.’ 나는 오독과 올바른 독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