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헐리웃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 그것이 꽤 재미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좀 더 다른 것을 좋아한다. 이 글은 리차드 커디스 감독의 영화 『어바웃 타임』에 대한 작은 감상노트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그의 영화를 제대로 읽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무슨 말이든 써볼까 싶다.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나의 연인과 함께 한 영화이다. 어느 연인들처럼.


영화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어느 인물의 사랑이야기로 구성된다. 성인이 되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가문 남성들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인생이 달라진다. 그는 시간여행을 통해 사랑을 이루고 싶었고, 첫사랑은 실패했지만 어느 날 찾아온 한 여성과의 사랑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가정을 꾸린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금씩 바꾸어 간다. 시간은 이제 그에게 온전히 귀속된다. 그 절정은 그의 결혼식에서 화려하게 표현된다. 비가 몰아치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지만, 어느 것도 나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즐겁고 화려하다. 결혼을 하는 연인들도 그들을 축하하는 하객들도 모두가 화려하고 즐겁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하객들이 비를 맞고 폭풍우가 몰아쳐서 피로연의 천막들이 다 찢어지고 난리가 이만 저만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렇다, 시간이 온전히 한 개인의 능력에 귀속되듯 이제 근대적 법칙은 작동하지 않고 탈근대의 모든 환영들이 그의 의식 안에서 낭만화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모든 상품들은 삶의 풍요로움을 예찬한다. 마치 후기근대의 풍요로운 소비주의 사회를 제시하듯이 말이다. 50살에 은퇴한 교수의 아들인 그의 삶은 온통 상품의 풍요로움으로 뒤덮여 있다. 산더미 같은 아버지의 서재, 작은 마을에서의 소소한 전경들, 변호사라는 화려한 직업과 런던시내의 수 많은 어트랙티브. 섹스도 빠질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즐거운 섹스는 영화의 위트와 함께 반복적으로 소비된다. 보드리야르는 가장 아름다운 기호가 인간의 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 화려한 상품의 풍요에서 섹스는 결코 빠질 수 없다. 또한 가장 화려한 도시의 전경이 극단적으로 예찬되기 보다는, 빅토리아풍의 ‘낭만적 사랑’과 그 시기의 가부장제가 미화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설득한다. 


하지만 시간의 법칙은 결국 거스르지는 못한다. 사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시간의 법칙이 완전히 무시되는 시간여행의 영화가 흔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이미 뻔한 것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아무리 자유롭게 한다 한들, 시간의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지는 못하는 것은 여전히 어떤 근대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정도로는 이 영화가 대단히 모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삶을 풍요롭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데, 그 방법이야 말로, 가장 포스트모던한 것이라고 할만했다. 아버지가 제시하는 풍요롭게 삶을 사는 법은 이렇다. 시간여행을 통해서 두 번씩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경험하는 삶에서 한 발짝 멀어져서 살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삶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관조하는 것만이 풍요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가장 인간소외적인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다소 불명확하게 쓴 것 같은데, 사실 나는 그러한 구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듯 애당초 근대는 유동적인 것이고, 소비사회의 관조하는 군상들의 소외들도 사실 근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