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정체불명의 어느 카페에 자리하고 있다. 커피 값은 비싸지만 공간은 꽤 쾌적하다. 나름대로 분위기도 그럴싸하다. 이곳은 꽤 특이하다.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대화를 하거나 혹은 매우 조용하게 꾸며진 공간에서 혼자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창조’적인 생각이라도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책을 ‘공유’하면 커피값이 할인된다. 그리고 공유한 책은 책장에 꼽히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모임을 하면 모임비를 지원한다는 명목아래 커피값이 할인된다. 나름 공유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자기계발, 인문학, 창조, 힐링, 호혜경제 등. 오늘날 지적 지형의 최전선에서 만날 수 있는 낱말들이다. 대단히 세련된 표상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세련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refine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sexy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욕망에 기초한 이론을 지지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일찍이 우리사회에서 진보적 표상을 가지고 부유하고 있는 이른바 이타적 인간, 착한 경제와 정확히 반대되는 기획이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이 문제를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힘’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이들의 기획들은 이른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모순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은폐하는 대신 경제와 사회의 대립이라는 형용모순적인 – 경제관계는 과연 사회관계와는 다른 대립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가 – 전략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인 것은 낭만화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담론은 자기계발, 창조, 호혜경제 등과 같은 말들과 무관하게 등장하지 않듯이, 진실은 그것이 사실 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체에서 그것의 보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좌파적 인문학의 최전선은 어떠한가. 남한사회에서 이것은 여전히 포스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의 이른바 피디이론과 그 논쟁들 이후, 남한의 마르크스주의는 후퇴하였다. 사회구성체논쟁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논쟁은 자폐적인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90년대 이후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노동운동의 후퇴, 이론의 후퇴를 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극복되지 못하였고, 그 공백에 포스트주의가 침투하였다. 레닌이 말한 ‘비판의 자유’가 일면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이른바 비판의 자유라는 이름아래 각종 포스트주의의 논쟁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대중이데올로기는 더욱 더 정념적인 것으로 격화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일간베스트라거나 촛불시위 이후의 반-이명박/박근혜 정서처럼 말이다. 결국 대중의 정념에 대한 지도 할 실천적 이론의 실천도, 혁명적 교양도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할 세력도 부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 결론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