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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윤석철, 『경영학의 진리체계』, 경문사, 2005에 대한 나의 짧은 메모를 다시 쓰는 것이다. 일전에 나는 황정희의 『자본가의 임금론』, 태을출판사, 1998에 대한 독서노트를 쓴 바 있다. 두 책 모두 대단히 보수-자유주의 경제학의 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조야한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고, 나는 그들 책을 마치 노직이나 하이에크, 포퍼와 같은 보수-자유주의 이론과 비슷한 것이라고 조차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 두 책에 대해서 결단코 성실하게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정희의 것은 그가 가진 어떤 이론적 조야함을 독서노트를 통해서 거칠게나마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윤석철의 것에서는 그러한 일에 집중하지 않을 생각이다(그러한 이유 중에 하나는 윤석철의 것은 내게 지금 없기 때문도 없진 않다).
황정희의 것 보다 윤석철의 것은 보다 더 많은 사상가들의 이론을 잡다하게 짬뽕시키고 있는데, 스피노자, 데카르트, 헤겔, 리카도, 모스, 등의 이론을 그야말로 엉터리로 사용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회의라는 두 글자를 제외하고 어떤 철학적 논의도 이해되지 않으며, 모스에 있어서는 교환이라는 두 글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책에 쓰여있는 그의 약력을 살펴보면 이른바 ‘프린키피아’라고 이름지은 경영철학 서적을 저술한 바 있다. 경영학을 과학의 대명사 뉴턴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수사로밖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내가 친구에게 연애상담을 해준답시고 너는 지금 순환적 위기에 빠졌을 뿐, 장기적으로는 이윤율 상승 국면에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마르크스적 수사를 사용한 조언을 하던 모양새와 정확히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황정희의 경우, 마르크스를 명시적으로 비판하는데, 윤석철에 와서는 단지 암묵적으로만 비판한다. 절대주의냐 상대주의냐 하는 그의 문제의식이나 (그는 모든 것의 결정은 모든 다음과정의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상대주의의 주장을 내보이는데, 이는 명시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왈라스를 염두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이론에 대한 그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지점들이었다. 가치법칙이라는 이름 하에 내보이던 그의 주장은 아주 쓸데 없는 것이었지만, 흥미로웠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가치(W) > 가격(P) > 생산비(C)이어야, 장기적으로 기업이 생존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 당연한 것이다. 가격보다 생산비가 높으므로 기업은 이윤이 생기므로 당연히 생산을 계속할 수 있고, 가격이 소비자의 만족도라는 상대주의적 가치이론을 채택하므로 만족도가 가격보다 커야 장기적으로 생존하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가격이 가치보다 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사실 저러한 부등호의 법칙은 매우 상식적인 것인데, 그것을 가치이론까지 전제해가며 주장하는 것은 그가 정치경제학에서의 가치이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등가교환을 전제로 하는 마르크스적 관점에서는 이는 매우 괴상한 것인데, 우선 심리적 효용으로서의 가치와 화폐로서 표현되는 가치가 교환되는 것도 이상한 것이지만, 교환이 부등가교환이라는 것도 이상한 것이 된다. 우선 질적으로 다른 것이 교환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경우 모든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가치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므로, 가치와 사용가치가 교환되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부등가의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해석은 대중적 상식에 비교하여 볼 때에 자연스러운 것인데, 마치 자본축적의 비밀은 결국 개인적 심리적 만족을 대가로 더 많은 화폐를 수탈하는 것을 선전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의 조야한 주장들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표방하고 있는 “사회적 다윈주의”도 들 수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 가서 사회적 다윈주의에 대해서 주창하는데, 그것은 그가 지금껏 설명하던 경영이론들이 결국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어 준다. 다시 말해서 그가 주장하는 경영학의 진리체계라는 것은 결국 ‘기업의 생존전략’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의 독재마저도 그와 같은 생존전략의 최적선택쯤으로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과거 박정희의 독재는 집단적 효율성을 최적으로 여기던 당시의 최적선택이었고 요즘은 정보화시대이므로 그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므로 굳이 무어라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다.
책의 결론은 주체사상이 생각날 정도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개인에게는 각자 삶의 이념이 있고, 기업에게는 경영이념, 국가에는 정치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념이 빈약한 인생, 기업, 혹은 국가는 중심을 잃고 부유하는 조각배가 되어 작은 풍랑에도 휘말리기 쉬울 것이다. 개인이나 조직이 이념을 정립하고 그 실현을 위해 정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직구성원들의 응집력은 지도자의 인간적 매력에서 오고 매력은 그가 추구하는 이념의 함수라는 사실이다." 이 역시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나는 역시 여기에 다윈에 대한 두 가지 독해가 놓여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윤석철의 글 자체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아주 아마추어적으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더구나 그 어떤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매우 부정확할 것이다. 나는 이 문제가 자연주의에 대한 문제라고 이르고 싶다.
일찍이 우리는 마르크스가 다윈을 비롯하여 자연과학의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거쳐서 플레하노프과 스탈린으로 이어오는 유물결정론이 제출되었다. 또한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과 알튀세르의 구조인과율과 과잉결정 개념을 통해서 좌파적으로 제각각 전유되었다. 또한 다윈은 가장 대표적인 우파적 전유로서는 스펜서를 통하여 사회진화론으로 전유되었고, 최신의 것으로는 도킨스의 것도 존재한다. 한편 윤석철이 제출한 독해에서는 두 가지 논점이 조야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기업의 생존전략으로서의 진화론이고(여기서 진화론이란, 적자생존일 것이다), 여기서 진화론은 마치 게임이론과 같은 것이다. 또 후자는 국가의 생존전략으로서의 ‘주체사상’이다. 윤석철이 박정희를 지지하고 나섰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천박한 자연주의가 그를 주체사상으로까지 이르게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아포리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문자 이론을 건축하기 위한 노정에 자연주의의 문제, 보다 모호한 표현으로는 과학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튀세르가 이 문제에 해답을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