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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80년대에는 교회가 많아서 문학모임이 많았다고 회상하신다. 그리고 그 원인을 교회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엉뚱한 결론을 내놓으시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그 시절의 변혁운동도,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청년문화도 모두 녹아버렸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것은 바로 그 시간을 복권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한동안 책의 시간은 끝난 것만 같았다. 이제는 책이 아니라 뉴미디어의 시대라고 말하고, 누구나 책은 낡은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읽기 라는 것은 대단한 유행처럼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만큼 이것은 열풍인 것 같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늘날은 인문학의 대유행이다. 책읽기는 이제 유행적인 미덕이며, 여기저기에서 권장되는 일이다. 책을 읽자는 대중적 사업들도 많다. 자생적인 것부터 기업주도의 것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날 어디에서도 어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 담론 자체가 체제대체적 실천이기 보다는 체제보완적 실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실 당연한 현실에 대한 자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늘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소박한 공동체를 꿈꿔왔었다. 그리고 학교를 복학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그런 모임을 꾸리거나 참여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소학회에서부터 독서모임, 세미나 등등. 물론 그런 모임들을 꾸리다 보면 자연히 이래저래 장해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데, 사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서모임을 하다 보면, 자연히 새로 오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계발을 꿈꾸는 이들이다. 물론 자기계발은 좋은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행위를 하며 그것이 미덕이다. 미래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 인가. 하지만 이른바 지식인들은 대중들에게 어떤 책이 좋은 책이고 어떤 책이 좋지 않은 책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양질의 대중서를 쓰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스스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가 되기를 자처한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꾸준히 양서들이 출간되면서도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모임을 꾸리면서 매번 겪는 문제 중 하나는, 모두에게 두루 읽힐만한 양서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원인과 결과로서, 청년학생 사회는 붕괴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사실 붕괴되었다는 말은 별로 성에 차지 않는다. 어느 유명한 문구에서 사용된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녹아버렸다(melted)’고 표현하고 싶다. 나도 책을 읽는 일에 게으르고 한참 미흡할 뿐이지만, 어쨌거나 모임들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오늘날 청년학생들의 독서토양은 미흡하고 때문에 어느 때 보다 책읽기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거나 대중서를 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당장에 나의 지도교수님 조차도, 대중서를 내는 지식인들을 두고서 내게 ‘이미 우리와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나름 진보적인 성향의 교수님이시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한번도 알려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그리고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여전히 고리타분한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사실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은 전문가와 정치인들에게 맡겨버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고 정치고 과학이고 그것을 어찌 대중들보고 하라고 요구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대중들에게 책읽기는 절실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날의 인문학, 힐링, 책읽기 열풍이 비록 체제보완적인 담론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대중적 지지가 뒤따르는 것은 그만한 대중자주적 요구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금의 상황은 아마 그러한 요구에 대한 일정한 굴절이 다름 아닐 테다.
사실 모임을 운영하다 보면, 모임에 참여하는 청년학생들이 책에 대해서 참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에 서투르다는 것을 느낀다. 한번은 감상을 짧게 써오라고 하자, 한 후배가 인터넷에서 책에 대한 독후감들을 짜깁기해온 적이 있었다. 자기 생각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정답을 복사 붙여넣기 해야 하는 하나의 숙제일 뿐인 것이다. 나는 박가분이 논한 ‘일베의 사상’도 이러한 상황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안녕들 하십니까’가 한참 대중적으로 확산될 때,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주현우를 보고서 자기 생각을 그렇게 크게 써서 붙이다니 참 용감하다고 평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이 내심 상당한 충격이어서 따로 메모해두기까지 하였었다. 생각해보면 불문과를 나온 그는 늘 글을 쓰는 것을 잘 못 써서 지적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인물이었다. 청년학생들에게 함께 책을 읽고 세상만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 자체가 스스로 요청되는 일이면서도 너무나 부족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변한 것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서점에 각종 자기계발서, 힐링서적, 실용서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남한에서 마르크시즘이 폭발하던 80년대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 시절에도 지식인 이데올로그는 있었고 오직 각자의 생계에만 골몰해야만 했던 상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당대에 가능했던 어떤 헤게모니는 오늘날 종식되었고, 결국 우리는 누구의 지도를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를 지도하고 견인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나는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