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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몇몇의 글에서 직접적인 생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천성환의 「열사의 정치학과 그 전환: 2000년대 노동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주진우의 「안녕들 하십니까」가 이슈가 될 무렵 고려대에 붙어진 어느 고학번 학생의 대자보, 수년 전 어디선가 읽었던 어느 신문 사설, 그밖에 내가 수년 전에 쓴 글귀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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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한 노동자가 분신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보고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대의가 과연 개인의 생명을 끊도록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당시에 나는 열사의 죽음을 두고 카미카제가 떠오른다고 적었다. 그러한 나의 문제의식은 이후 이기심에 대한 예찬에 대한 문제로 꾸준히 이어졌다. 개인의 생명을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정치는 말하자면 이기심에 대한 반역이고, 내가 보기에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도 죽기를 바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다분히 낭만적일지라도 말이다.
한편 오래 전 나는 어느 신문에서 ‘한의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설을 본 적이 있다. 이는 노무현 정권 당시 노무현이 노동운동을 탄압하며 그와 같은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내 기억에 그 신문은 한겨레였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즈음 춘투를 예고하는 노동계에게 하는 주장이었다. (물론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노무현 정권 당시 2007년 겨울의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설을 두고서 그 천박함에 뒤늦게야 분개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러한 언설이 이른바 ‘일베 류’의 사상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열사의 정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때때로 열사가 노동계의 ‘자살종용’으로 탄생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마치 이슬람 자살폭탄 테러와 열사를 동일 선상에 올려 놓는 것이다. 마치 민족주의자들의 우상처럼 표상되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들이 열사의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박가분이 훌륭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들에게 세계는 다분히 동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계는 동물적인 이기심에 다름 아니다.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숭고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과는 무관하게, ‘죽음의 정치’라는 것이 가지는 유효성은 분명 과거와 같지 않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어느 열사의 등장을 목도하지만 그들을 기리는 것은 대단히 소수일 뿐, 사회적으로 파급되지 못한다. 지속적인 열사의 등장하면서도 그 유효성을 의심받는 상황은 사실 노동계의 가능한 정치수단이 그와 같은 최후의 방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면서도 유효하지 않는, 노동계의 정치적 아포리아를 지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천성환의 글에서 열사의 정치는 마찬가지로 두 가지 불가능성을 보임으로서 아포리아를 제시한다. 그 불가능성의 아포리아는 하나는 더 이상 열사의 정치학이 가능하지 않음으로 더 이상 노동자의 죽음이 열사로서 가능하지 않음을,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정치학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으로 두 가지 불가능성이라는 아포리아인 것이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이 아포리아는 다음과 같다. 더 이상 열사가 가능하지 않음은 ‘이기심 예찬’의 세계에서 숭고미가 가능하지 않음을, 열사의 정치학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은 그 필요성에 대한 역설이다.
최근에 가장 이슈가 된 열사는 삼성전자서비스노조의 최종범 열사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결하기 전 전태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때문인지 작년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시청에서 행진을 시작한 시위대오는 평화시장 전태일다리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가지며 최종범 열사의 넋을 기렸다. 의미가 전승되는 이상, 1970년 11월의 사건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