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신문, 김승호, 「관조하는 공산주의 철학자들 」, 2013.10.14.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186)

경향일보, 황경상, 「‘포스트 담론’ 마르크스주의 애도 치중, 신자유주의와의 투쟁 망각」, 2012.6.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91955415&amp%3Bcode=960201)

한겨레, 최원형, 「‘포스트 담론’ 20년, 신자유주의 키웠다」, 2012.6.17.,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38171.html)

레디앙, 박노자, 「포스트주의 담론,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 2014.1.23., (http://www.redian.org/archive/66082).


포스트주의 이후 철학은 더 이상 새로운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구조주의 철학의 개연적인 효과라는 생각도 들지만, 결코 긍정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내 기억에 2012년도 겨울 즈음,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다던 한 학생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아주대 학생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기대에 부풀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만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았는데, 그와는 별개로 나도 그에게서 모종의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수유너머에 있는 고병권 밑에서 공부하는 아이였다. 그는 수유너머와 같은 이른바 탈주파와 마르크스주의 양자를 전혀 구분할 줄 몰랐다. 이후 나는 또 새로운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2013년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있다던 아주대 학생은 또 다른 의미로 이른바 포스트주의에 경도된, 관조자였다. 운동의 몰락 이후, 이론의 몰락 이후, 세계는 비극적으로 변모되었다. 노동조합은 코퍼러티즘에 경도되었고, 청년학생 사회는 와해되었다. 이론도 운동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사회의 이념지형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그리고 시장만능주의, 인민주의, 사회적 경제론, 포스트주의가 만연하다.


나 역시 관조하기를 즐기며, 포스트주의의 그 패셔너블함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비판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포스트주의의 문제를 처음 인지한 것은 프랑스 철학이 지니는 그 패셔너블함에 막연한 반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에서는 내가 프로테스탄티즘으로부터 물려받은 모종의 유산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유일신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디우를 읽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는 이런 저런 책을 읽었겠지만, 이 문제를 어렴풋하게 나마 인지하고서 처음 읽은 책은 바로 바디우였다. 그는 진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디우의 『조건들』을 읽었고, 다음으로 읽은 것은 『철학을 위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조건들』은 당시 다 읽지 못하였다.


오늘날 포스트주의는 나의 아주 의식적인 비판대상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알튀세르를 관계하기도 한다. 그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기도 하는데, 상당히 매혹적인 일이기도 하다. 내가 요즘 느끼는 사유의 벽은 어쩌면 그와 관계하기의 난해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튀세르는 직접 읽기 보다는 언제나 간접적으로 마주하는 일이 잦았는데, 직접적인 대면은 『재생산에 대하여』, 『맑스를 위하여』,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자본론을 읽는다』뿐이다. 특히나 『재생산에 대하여』는 내가 아무런 문제의식도 아무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서 읽은 것이었고, 『맑스를 위하여』는 난독을 했기에, 사실 나는 그를 거의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 늘 어려움을 준다.


링크한 기사들은 포스트주의 비판에 대한 칼럼과 기사들이다. 이론 이후 맥락 없이 수용된 우리사회의 포스트주의는 교조주의 부재 속에 교조주의 비판이라는 과잉을 낳았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관조하거나, 그를 애도함으로써 그를 죽이는데 주력할 뿐 신자유주의와 전선을 펼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 담론이 기성의 체제와 자유주의에 조력하는 것에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링크한 글들에서의 내용들이기도 하다. 어차피 나는 글의 결론을 쓰지 못한다. 나의 생각들이 진전되지 않듯이, 이 글도 더 이상 쓰여질 수 없다. 그냥 이대로 글을 마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