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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와봤는데, 마르크스의 『자본』이 보이길래 몇 가지 남긴다. 네 블로그가 싸이월드가 아니라 티스토리였다면 훨씬 더 자주 왔을 텐데 말이지. 내가 누군지는 짐작하리라 믿는다. 나는 종종 지적 공동체를 꿈꾸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하는 지적들을 오해하지 말기를.


첫째는 교환의 문제이다. 『자본』 새 번역자인 ㄱ교수가 워낙 헛소리를 많이 해대고 다녀서, 이 문제는 ㄱ교수의 해제라든가 하는 것들을 통해서 왜곡된 채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착취의 문제를 교환이 아니라 생산의 영역으로 논의를 옮겨간다. 이것은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인 지배노동가치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환 중에서도 특수한 형태의 상품인 "노동력 상품"(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은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달리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함으로써 가능하다)이 교환되는 과정인, 생산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교환을 중시 여기는 해독은 일본의 고진이라거나 ㄱ교수처럼 곡해하는 사람들의 소산이고(그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반적인 해석은 아니라는 뜻에서) 대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M-C-M’의 자본운동과정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가치가 형성되는 곳은 교환이 아니라 생산일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둘째는 공황에 대한 설명이다. 이른바 공황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르크스의 공황론은 미완인 채로 끝낸 것이 맞다. 다만 이후의 올바른 설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크게는 ①과잉생산설 ②불비례설 ③이윤율저하설으로 나뉜다. 물론 이 모두를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더 좋다. ①, ②는 제2 인터네셔널에서의 논쟁에서 나타난 것이고, ③은 이른바 근본주의적 해석이다. 공황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권에 등장하는 재생산표식과 3권의 공황에 대한 논의를 읽어야 한다. 물론 1권에도 단편적으로 공황에 대해 논하기는 한다. 재생산표식에 대해서만 설명하면, 마르크스는 모든 산업부문을 단순화 시켜서 1부문과 2부문으로 구분한다 1부문은 생산재, 2부문은 소비재다. 과잉생산설은 케인즈식의 유효수요 부족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불비례설은 이때 1부문과 2부문의 상품이 모두 다 팔려야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데, 부문 간 불비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생산재부문과 소비재부문 간의 고정자본 등의 비율이 다르므로 시장변동에 대한 대응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①, ②번 설명에게 ③번의 이윤율 하락은 단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①, ②번 설명은 마르크스가 2권에서 논증하듯 자본주의 불안정성을 보여줄 뿐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해내지는 않는다. 부연하자면, 마르크스는 2권 재생산표식에서 모든 표식이 균형을 이루고 공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③의 설명은 그런 의미에서 이윤율 하락이 원인이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이유는 자본 간의 <경쟁>으로 불변자본이 증가하여 궁극적으로 이윤율을 하락시킨다. 이에 대해서 이것은 경향적 법칙인지 일반적 법칙인지에 대한 쟁점이 존재한다. 어찌되었건 마르크스의 논의에 따르면 단지 자본가의 이기심이 충만해서 공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본론은 공교롭게도 <인간학적> 의미에서 노동자도 자본가도 다루지 않는다.


착취에 대한 이론이든, 공황에 대한 이론이든, 마르크스의 『자본』에서의 논의는 다분히 과학적 방법론에 인한 것이지, 인간학적 이기심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초기자본주의 노동자에 대한 연민을 논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보이게 마르크스는 이기심의 예찬자인 맨더빌의 후예일 따름이다.


셋째. 과도기 문제였다는 지적에 대해서 이다. 『자본』은 공교롭게도 아주 척박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서적이 아니다. 당대의 노동환경은 아주 저주스러웠고 말하자면 불공정거래였다. 하지만 『자본』은 그러한 불공정 거래에 대해서 결코 논하지 않는다(물론 부분적으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매우 단편적이며, 매우 반복적으로 그것이 본 서의 연구대상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자본』에서의 세계는 매우 추상적인 세계로, 오히려 아주 공정한 거래만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때문에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을 상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클린clean한 상태(그런 의미에서 『자본』은 신고전파의 세계와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은 일본 좌파 경제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과도기’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자주 논한다(고대부터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초기, 아시아 등). 그리고 그 과도기의 자본주의와 순수한 추상형태로서의 자본주의를 정확히 분별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가 『자본』을 통해 명시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학(=정치경제학=고전파 경제학)”이다. 부제로 달려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물론 경제학과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학과 자본주의 경제는 연관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은 자본주의를 붕괴하고 혁명을 하자고 논하지 않는다. 따라서 봉기를 위한 경제학으로는 어떤 결여가 존재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곡해이다.


네 번째는 이른바 생산력주의에 대한 논의다. 마르크스는 분명 부르주아의 시민혁명에 대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혁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확히는 그 업적과 동시에 한계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일 테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상은 더 풍요로운 발전과 삶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지양’의 철학적 용례일 것이다. 다만 다분히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이 산적하다. 자본주의가 어떤 한계를 통해 사회주의로 도달될 것이라는 내용은 정확하게 말해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호 모순이 되는 지점을 지적한다. 이때 생산력의 발전으로 기존의 생산관계 간의 모순이 심화되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 이른바 생산력주의이다.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 스탈린주의라고 명명되는 이론이고, 경제주의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단순히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다. 마치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사회주의로 이행되는 것이라는 이론의 자기발전이 가능하다. 자본주의와 스미스의 이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유익할 수 있으나, 이와 같은 『자본』에 대한 이해 방식은 오해가 많다.


덧붙여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혼란스럽게 사용되지만, 사회주의를 통상 이행기의 상태로 사용된다. 즉,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 자체가 천천히 이행되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천천히 하자고 말할 수는 있으나,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애당초 『자본』에 그런 말은 아에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1권부터 3권 마지막 엥겔스의 보론까지 다 읽어도 마찬가지다.


다섯째는 변증법에 대해서 논해보자. 이른바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로까지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은 헤겔의 것을 거꾸로 한 것과 같다라는 모호한 말로 규정한다. 헤겔의 것을 거꾸로 한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크게 논리주의와 역사주의로 나뉘며, 더 나아가 나도 잘 모르는 복잡한 논쟁이 존재한다. 무엇이 되었건 헤겔의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으로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마르크스에게 적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나 『자본』 2권 서문(아마 2권이 맞을 것이다)에서 그는 1권에서 자신이 헤겔의 문체를 따라 했지만 그러한 것을 정정하노라고 고백한다. 흔히 헤겔의 것은 구체에서 추상이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간다고 말해지지만, 2권에서부터 마르크스는 헤겔적 문체를 사용하지도 않을뿐더러, 1권에서도 헤겔식의 논리학 방법과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단지 문체나 서술 방법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변증법은 (유물론적) 역사에 적용되는 것으로, 헤겔의 변증법과 특이할 만한 상관관계는 없다. 심지어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헤겔주의자였던은 없다.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라 (청년 헤겔파였던) 포이에르바하주의자였고, 이후 인간학으로부터 인식론적 절단을 하였다고 단언한다. 절단의 최대 저작은 당연히 『자본』이다. 특히나 정반합으로 이해되는 변증법에 대한 단순한 이해는 단지, ‘비판(critique)’에 대한 서구철학 전반에 존재하는 이해와 유사한 것일 뿐이다. 칸트를 보라. 인간이성은 서구철학에서 줄곧 부정하면서 긍정했을 뿐이다.


마지막은 간단한 변이다. 본 글도 마찬가지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서평도 함께 읽었지만, 그렇게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문단의 폭이 지나치게 길어서 가독성이 무척 떨어진다. 경제사상사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으로서, 국부론에서의 이해는 다분히 신자유주의적이다. (그리고 오늘날 경제학계는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즉 이른바 신고전파와 오이켄과 같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학파, 하이에크 같은 오스트리아 학파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일상에서든 학계에서든 승리함에도 불구하고 독점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지 스미스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내재적 모순에 봉착했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경제이론은 그대로인데 현실과 전혀 다르다면, 스미스를 똑바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현실이 괴리되면서 파산했다는 것이다. 만일 사회주의의 실패로 마르크스가 파산하는 것이라면, 독점강화, 불평등 심화, 공황 발발, 비효율 증대로 주류경제학이 파산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런 의미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