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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은 언제나 나에게 생각의 시간을 제공해준다. 밤은 원래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는 늘 이런 고요를 좋아해왔었다. 나는 지금 시간이 벌써 새벽 다섯 시가 훌쩍 넘었지만, 나는 자는 것은 좀 더 미루기로 하였다. 오늘의 글은 오늘 낮에 있었던 나의 불쾌감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을 위한 것이다.
나는 늘 세속에 대한 예찬을 마지않아왔었다. 세속화는 예찬되어야 하고, 개인이 욕망은 긍정되어야 하며, 모든 성스러운 것은 기만적인 것으로서 폭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지적 태도였다. 그런데 나는 현실에서는 유난히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일도 그렇다. 나는 모든 이론적 속류주의에 대해서 항상 반대하거나 반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왔거나 또는 그러한 태도를 취해왔다. 많은 경우 나름의 최소한의 범위만큼 속류성에 대한 침해될 수 없는 범위를 설정해왔다. (나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더 한 풀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생략하도록 할 것이다.) 비단 이론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나는 몰-교양적이지는 않을 만큼 적당한 교양을 습득하고서 그것을 향유하는 만큼, 나는 음악이나 영화, 미술 등 다른 문화 예술에 대한 부분들에서도 나는 어김없이 그러한 성향을 보여왔던 것이다. 나는 전혀 세속적인 것, 속류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것이 나의 포지션이었던 것이다. 주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원래 그랬다. 나는 다분히 자기애적이었고, 나의 특별함에 관심을 두던 인물이었다. 오늘날 그러한 것들이 모두 표면적인 부분에서, 즉 의식적인 부분에서 사라졌다면, 오로지 무의식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여전히 작동한다. 세속화에 대한 예찬은 그러한 역설이 간직한 어떤 히스테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혀 정신분석학적인 이야기와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음악은 내게 매우 중심적인 공간을 점유해왔었다. 나는 예전만큼 음악을 열심히 듣지 않지만, 그것은 지금처럼 성스러운 나를 만들어주는데, 많은 공간을 차지하였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음악을 듣는 일은, 한편으로는 나를 성스럽게 만드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나와 타자의 차이 그 자체로부터 나를 주체화시키는 일이었다. 그건 많은 경우 나를 고독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는데, 또 많은 경우 나를 매우 즐겁게 했었고, 나는 지금도 그것을 전혀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예전처럼 음악을 열심히 듣지 않지만, 많은 경우 안 듣고 하루를 잘 보내지만, 음악 없는 나의 삶은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다.
음악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떨까.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 아이러니컬한 나는 그래도 이것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성스러움도 속됨도 결국 나의 자기애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기에,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원초적인 긍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나의 감정이다. 매우 중구난방인 이상한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졸린 눈으로나마 어린 나를 본 것 같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