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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학의 출현은 우리가 다들 알고 있다시피 케인즈로부터 출발하였다.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은 이후 해로드와 도마에 의해 각각 동태화된 형태로 시도되었고, 이후 솔로우가 정립한 경제성장이론은 현대적 경제성장이론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솔로우의 모형의 간단한 함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이 언젠가 일정한 지점에서 수렴한다는 것이었다. 저축률에 따라 자본축적은 더 커지지만 그것은 수렴될 때의 자본량에 변화를 줄 뿐, 수렴한다는 것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수렴점을 균제상태(steady state)라고 부른다.
균제상태, 때로는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라고 부르는 이것의 출발은 스미스로부터 시작된다. 스미스는 이기심이 경제의 성장을 낳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기심을 긍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화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성장이 종결되는 상태를 전제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상상태였다. 스미스는 이러한 정상상태를 시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아서 분업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에게 생산성은 분업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한편 멜서스는 인구론적 전환이 이루어졌고, 리카도는 지대의 한계수확 체감을 통해서 성장의 지체를 확인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에 있어서의 정상상태에 대한 논의들이었다. 마르크스는 기술의 편향적 진보의 문제를 정상상태와 연결지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칼라일은 경제학을 두고 음울한 학문이라고 칭하였다.
마르크스가 ‘천박한 절충주의자’라고 지칭하였던 밀은 칼라일의 이러한 비난에 반박하기 위하여 정상상태의 개념을 수정한다. 정상상태는 경제가 붕괴하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증가율이 오르지는 않지만, 균일하게 성장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를 의미하던 정상상태가 자본주의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균제상태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1]
다시 돌아가서, 솔로우는 이러한 밀의 균제상태를 수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만하다. 기술은 외생적으로 결정되며, 생산요소는 자본과 노동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솔로우 모형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솔로우 모형의 난점 수렴에 대한 문제였다. 즉 왜 자본축적이 충분히 이루어진 선진국에서 성장이 멈추지 않고 여전히 성장이 지속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새성장이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답은 인적자본을 도입하는 것이었고, 인적자본이 지속적으로 축적되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인적자본론, 즉 새성장이론의 특징은 기존의 자본과 노동뿐 아니라, 인적자본이라는 것이 고려된다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이 내생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적자본이 진정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내는지 인과관계가 분명한지에 대한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적자본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기필코 경제학 제국주의와 유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은 방법론적 제국주의를 드러내고 있고, 모든 사회과학적 분석 대상에 대하여 경제학적 분석방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고, 인적자본은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제기할 만한 특징은 다소 철학적이다. 우리는 일찍이 스미스를 거론하면서 그의 이론이 자본주의를 설명할만한 처음의 만족할만한 이론이자, 동시에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 이론이라는 것은 설명의 수단이자 동시에 정당화의 수단이다. 지식은 대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지배하기도 한다. 나는 새성장이론에서 바로 그것의 새로운 형태를 확인한다. 다른 경제학이론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는 솔로우의 성장이론을 확인하면서 그것이 밀의 균제상태로 도달하는 경로에 대한 수학적 표현임을 지적하였다. 솔로우의 성장이론에서 그것은 어쨌거나 결국에 균제상태에 도달한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새성장이론에 와서 이들의 이론은 더 이상 균제상태에 반드시 도달할 필요는 없다. 새성장이론에서 경제는 영속적 성장이 가능하다. 스미스의 정상상태는 밀의 균제상태를 거쳐서 솔로우의 성장모형으로 나타났고, 다시 새성장이론에서 영속적 성장 경로가 확인된다. 자본주의의 영속화는 이렇게 이론적으로 더욱더 심화된다. 자, 다음을 보자.
경제활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적 가상을 반드시 필요로만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는 우리는 거래를 하기 위해 상품을 주면 타인의 상품을 받을 수 있다는 교환경제의 가상을 기초로해야지만 그 거래는 성립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페를 두고서 그것이 종이가 아니라 가치를 저장하고 있다는 가상을 기초해야지만 화폐경제가 가능하다. 신용이나, 복합생산 등 보다 복잡한 경제현상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경제에는 반드시 경제학적 가상을 대당관계로 둔다. 이론이 보여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와 경제학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새성장이론 역시 이러한 관계에서 수행되는 역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적자본이라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정당화가 가능해야,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가계는 인적자본에 투자를 하고 인적자본을 투자하고, 인적자본을 또한 소비하게 된다. 경영학, 자기계발서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이다. 내가 새성장이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 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경제학이 자본주의의 영속화에 복무한다면, 우리는 위기의 경제학을 해야하는 것일까.
[1] 윤소영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보르트비치나 투칸바라노프스키 같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정상상태라는 개념을 오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독한 결과를 카셀이 정리하고, 이후에 해로드와 폰노이만에 의해서 정식화되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상상태는 기술진보가 고려된 장기균형상태이다. 그리고 이때의 기술진보는 부르주아 경제학과는 달리 편향적 기술진보로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거쳐서 종국에는 이윤율이 저하되어 나타난다. 한편 재생산표식론에서의 균형(즉 부문간 균형이 이루어져서 재생산되는 상태)은 기술진보가 고려되지 않은 상태로서 (장기균형상태인) 정상상태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상태를 정상상태로 오독하고 때문에 정상상태는 지속적인 균형성장을 균제상태(지속상태)로 이해한 것이다. 때문에 정상상태는 지속상태가 되었다. 여기서 내가 한가지 언급한다면, 지속상태는 최적상태의 특수한 지점으로 성장률이 0이 되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