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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 질문
대학에 들어와서 경제학과에 처음 들어가게 된 것은 대단히 충동적이었다. 입학 당시 우리학교는 지금처럼 학과제가 아니라 학부제였고, 사회과학부에 입학한 나는 그 해 2월에 있었던 오리엔테이션 날에 경제학과에서는 취업이 잘 된다는 선배 과대표의 말을 듣고 경제학과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까지 만해도 나는 ‘수학’과 ‘돈 계산’이 대단히 싫어하던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도 취업이 잘된다는 (물론 실제로 취업이 잘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경제학과에 입학하고서 나는 취업도 하지 않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그렇게 싫어하던 수학과 돈 계산을 매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한 결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수학을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대학에 올라와서 수학이 나름은 재미있어 졌고, 돈 계산하는 것이 각박해 보이지만, 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이해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제학교과서를 집필했던 알프레드 마셜이 말하지 않았었던가.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생각하고 고민을 멈추기에는 너무 단순한 것 같고, 어딘가 께름칙하다. 단지 수학이 생각보다는 지루하지는 않은 것이고, 경제학이 생각보다는 조금 중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경제학은 공부해야 하는가? 그것도 지금 그대로의 방식으로?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은 비록 대학원에 진학해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을 담을 글이지만, 혹여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진지하게 아니면, 흥미롭게 라도 읽어주기를 바란다.
자,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2. 이데올로기?
혹자는 경제학 전체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별안간 무슨 말 일까.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the queen of social sciences)’이 아니었던가. 이 말은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의 말이다. 경제학은 일찍이 수학적 표현을 통해서 고도의 과학적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그런데 경제학이 정말 이데올로기 일까. 물론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경제학 전체가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은 어째서 이데올로기라는 혹평을 듣고 있는 것 일까. 먼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는 무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데올로기는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르러 “이데올로기는 상상적(imaginary) 관계의 표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구별되는 것으로 상정한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집단에서 공유되는 어떤 허위적 또는 상상적 의식으로 집단에 소속된 개인의 실천을 규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경제학이 개인의 행동과 생각을 규제하거나 책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과연 그러한 일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일까? 또 만약 하고 있다면 어떠한 일을 하도록 또는 하지 않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우선 우리 대학가를 확인해보면 조금 실마리가 보인다. 우선 오늘날 대학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취업을 위해서든 아니든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고,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경제학 수업을 ‘교양(?)’으로 듣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우리학교는 아니지만 다른 대학에서는 경제학원론을 모든 학생들에게 의무로 듣도록 강제하고 있기도 하다. 경제학이 일종의 대학생의 교양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교양의 의미는 사실 졸업하기 위해 이수 해야만 하는 비전공 과목 정도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교양의 본래 의미는 ‘시민교육’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그렇다. 이 정도의 지식을 습득해야지 시민으로서의 지식과 실천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경제학이 곧 이데올로기는 아닐지라도,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학에서는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것 일까. 이는 경제학의 기초라는 경제학원론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경제학원론의 첫 장은 ‘모든 경제주체는 합리적이다’ 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가히 경제학의 제1명제라고 부를법하다. 그리고 이로부터 경제주체인 개인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합리적 선택을 하고, 이것이 모두에게 이롭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장 완전한 시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존재하고, 언제든지 시장에 진입할 수도 있고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완전경쟁시장이다. 놀랍게도 앞서 말한 자유로운 시장이란 말은, 완벽하게 경쟁적인 시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실제로 경제생활을 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소 배치된다. 우리학교 경제과 모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경제학과생들한테는 계속 반복해서 들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다른 학문이나 또는 비전공자 일반인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시장은 그렇게 자유롭지도 않고, 기업이 무수히 많지도 않으며, 정보가 완벽하지도 않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교환/교류 활동은 서로의 환영 속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기 보다, 무언의 강제 속에서 갈등이 내재한 채 이루어지고, 우리가 경험하는 경제활동이라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할되기 보다, 고용자와 노동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포트폴리오 투자를 통해서 위험자산의 최대치를 결정해서 수익을 얻기보다는, 주어진 임금계약을 통해서 수익을 얻으며, 모든 활동에서 일일이 정보를 수렴해서 가격을 계산해서 행동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제학의 전제 자체가 지금 우리의 주제는 아니다. 심지어 나는 아직 이러한 전제 자체가 경제학이라는 사회과학에서 합리적인 것인지, 비합리적인 것인지, 또는 필요한 것인지 불필요한 것인지, 온전히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의구심들은 경제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서는 과연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3. 단절
1988년 6월에는 ‘학술단체연합심포지움’이라는 이름의 학술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발표논문은 『80년대 한국인문사회과학의 현단계와 전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기조발제를 맡았던 서울대 사회학과 김진균 교수는 “민족적·민중적 학문을 제창한다”라는 제목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던 60-70년대 기성의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에서 탈피하여 지식인의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있고 또 단절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단절을 이르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폐쇄성에 사로잡혀 반쪽이론에 안주하는 이론적 보수성”과의 단절이자, “낯선 서구이론의 맹목적 도입에 몰두하거나 한국현실을 그 이론의 실험대상으로 삼는 학문적 비주체성”과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올해면 김진균 교수가 세상을 뜬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내가 이 케케묵은 이름을 꺼내 드는 이유라면, 그 단절이 지금에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간의 경제학은 특히 지난 30년간 고도의 방법론적 발전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론적 발전이라 함은 고도의 수리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카고 학파의 합리적 기대이론과 효율성 시장이론, 새케인지언의 DSGE(Dynamic Stochastic General Equilibrium; 동태확률일반균형) 모형 등의 이론으로 나타났다. 합리적 기대이론은 경제주체는 미래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정보를 활용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고, 효율성 시장이론은 금융상품에서 가격은 시장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정보는 완전하다는 것을 이론화 한 것이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DSGE 모형은 경제성장, 경제순환, 통화정책 등 모든 경제현상에 대하여 미시적 기초에 따라 일관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세련된 이론들이 과연 보통의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인 삶을 얼마나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는 다소간 회의적이다. 놀랍게도 저와 같은 이론들에 따르면 시장은 완벽하다. 가격에는 모든 정보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금융시장에서의 거품은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규제할 필요가 없다. ‘칠판경제학(blackboard economics)’이라는 말이 있다. 구체적인 사실 보다 논리적 엄밀성만을 추구하는 경제학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칠판경제학이 실제 우리의 삶과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고, 또 그래서 단절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질문하는 것이다.
4. 결어
몇 년 전 한동안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서브프라임 사태는 이제는 까마득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경제학도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미국에서 비우량 신용자에게 주택담보로 대출을 해주고 그 채권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다가 대부업체들의 연쇄 파산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이 일로 미국에서부터 출발하여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몰아 닥쳤다. 이 일이 경제학도에게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 사건은 비단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경제학의 위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경제학계에서는 유래 없는 자기비판이 진행 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전혀 틀린 것이 없다는 불변의 목소리도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경제학을 공부해야 할까. 또는 경제학은 과연 앞으로 어떠해야 할까. 나는 그 해답 역시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출간 된, 충남대 경제학과 류동민 교수의 책이 한 권 있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잠시 인용하고 싶다. 제목은 『일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학과에서 수년을 생활하다 보면, 경제학에 심취하여 가장 단순한 사실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친구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치 자신은 졸업 후에 취업을 하고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동자 다수의 이해와는 전혀 배치되는 사고와 주장을 하면서 그것이 진리인양 떠받드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경제학과에서는 이른바 ‘선의의 독재자 문제(Benevolent dictator’s Problem)’을 풀어서 최적의 가격, 수량 등을 결정하는 수학문제를 푸는데, 마치 자신이 그런 독재자가 된 마냥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론은 그리고 또 이런 공부는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해야겠다. 내 생각에 경제학은 더욱 더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현실에 부합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항상 한계생산성과 비생산성의 일치점에서 형성되는가? 노동자들은 항상 자발적 실업을 제외한 비자발적 실업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한정된 경우에만 타당하게 적용되는 매우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1936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자신의 저서 『일반이론』에서 한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비록 무의식 중에서나마, (신)고전학파보다도 본능적으로 더 합리적인 경제학자가 되고 있다.”(『일반이론』).
또한 카를 마르크스가 당대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했다. 노동가치론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대의 경제학적 논쟁들은 마르크스의 매우 상식적인 주장들에 의해서 논박되었다.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고, 때문에 노동력의 대가인 임금을 지불하고 남은 잉여가치는 자본가(고용주)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손해를 볼 경우에 자본가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당대의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면서 제창한 잉여노동가치론의 간단한 결론이다.
때문에 우리는 현실과 점점 괴리되어 가는 이론에 대하여 우려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수입은 단지 임금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고, 주식투자나 예금이자를 통해서도 수입을 얻는다. 즉 노동자는 노동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수입도 발생할 수 없고, 노동의 문제를 이반하는 경제학은 경제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학원론이 가르쳐주지 않는, 경제의 풍부한 현장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공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