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한 티비 영상물을 보게 되었다. 그 영상물의 내용인즉슨, 테보 라는 한 미식축구 선수의 기적에 대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는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선수로, 기적을 몰고 온다고 일컬어지는 이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매 경기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상징하는 316이라고 쓰인 패치를 붙이고 출전하였고, 그가 참전하는 경기는 늘 극적으로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유명해졌고, 마침내 프로 선수단에 입단하였는데, 프로경기의 규칙상 그가 늘 붙이고 다니던 316의 패치를 붙일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은 그 패치가 없으니, 이제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프로 경기에서도 멋지게 역전승을 이끌어냈는데, 놀랍게도 그날 그의 경기기록에서 316이라는 숫자가 연속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은 또 다시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이 '기적'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혹은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신존재증명을 언급하지도, 경험 일반을 가정하는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을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논쟁은 유익하지도 않고, 더이상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내가 분개한 것은, 오늘날의 시대는 예수가 부활하고 기적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 말하자면 기적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기적의 과잉이라는 점에서 였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후기 근대의 사회는 안타깝게도 기적은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무한히 존재한다. 우리는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아도, 그것이 실제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수 많은 기적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누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눈꼽만큼도 다치지 않고 살아났다던가, 죽은 줄알고 수술을 포기한 환자에게서, 다시 심장박동이 일어났다거나, 몇십년만에 우연히 잃어버린 가족을 찾게 되었다거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였지만 죽지 않았다거나, 실패만 거듭하던 사업자가 엄청난 성공을 얻어낸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무궁무진하다. 물론 그 이야기들 중에는, 와전되거나 과장된 허구들도 많겠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거짓없는 사실은 얼마나 있는지 하는 것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일지언정,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 사실 나는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이고 기적이라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실제로 그 기적들이 과연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고 있는 공간에서 얼마나 나타나고 있는가, 말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또는 수천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해고되는 상황에서, 자연이 파괴되거나 인권이 묵살되는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이라고는 스크럼을 짜고 버티는 것이거나 경찰방패와 대립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떤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서, 과연 기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기적의 과잉은 사실 기적의 부재를 현시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진리가 부재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말의 과잉만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