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위험한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노직의 '경험기계'와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조금 더 그럴싸하게 사례를 상상해본다면, 경험기계 대신에 어떤 소비재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비재는 마치 엄청난 쾌락과 만족을 주는 마약과도 같은데, 아무런 중독성도 없고, 건강을 해치지 않으며, 자기조절이 가능하며, 이것을 소비한다면 그는 매우 행복과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다. 심지어 이 소비재는 이 소비재의 생산기술이 매우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매우 값싸게 팔린다. 우리는 이러한 소비재의 존재를 상상해볼 수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소비재가 미래사회에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사실은 없다. 정말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이 소비재를 실제로 소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과연 혁명의 당위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사회는 여전히 차별도 불평등도 착취도 소외도 여전하다. 다만 우리가 성취한 것은 오로지 기술의 발전으로 이 소비재를 값싸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아니 그 전에 혁명은 당위성을 가지는 것일까. 해방사회란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