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보면, 아무런 보상도 없으면서도 남들보다도 훨씬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특별한 보상도 없이, 특별한 강요도 없이 그렇게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을 한다. 사실 나도 그렇게 일을 해본적이 있다. 예전에 작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나는 솔직히, 나를 제외한 세명의 아르바이트생의 노동량을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한적이 있었다. 물론 특별한 강요도, 특별한 보상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일을 했었나 생각해보면, 첫번째로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된 것이었음에도 그 과업이 내가 충분히 감내할만한 정도의 수준이었고, 두번째로 그때는 공익복무를 마친 이후여서, 그 안에서 내가 배운 어떤 사회화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었다. 어쩌면 어느 사회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 안에서는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어쨌거나 그런 생각을 해보면, 과연 노동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외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맑스는 노동이 오로지 소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계급의식은 분명히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노동자에게 노동이란, 소외인 동시에, 어떠한 의식적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대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초래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은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범람하는 소비문화 속에서 노동자의 의식이 소외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안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어찌되었건 간에, 노동하는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과정에서, 모순적이게도 어쩌면 상당한 성취감을 갖기도 하는 것일지 모른다.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취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노동자의 노동이란 소외일지 모르겠으나, 노동자가 갖는 그 감정적 측면에서 그 성취란 자명한 성취일지 모른다. 만약 노동해방에서의 성취감과 미루고 미루던 방청소를 끝냈을 때의 성취감과 소외된 노동에서의 성취감이 생물학적으로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구적인 소설일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논증이 해방에 대한 정당성을 기각한다거나, 맑스의 이론을 기각하는 것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럼에도 경제학 비판을 계속 고집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지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노동자에게 계급투쟁이란, 단순히 임금에의 주장은 아니라는 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계급이란 혹은 화폐란 임금보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노동자에게 (추상)노동이, 특수한 생산양식에서의 특수한 사회적 관계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화폐도 바로 그러한 것의 표현일 것이다. 날이갈수록 생산관계는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유적 관계는 다층적이고 과잉결정적으로 변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맑스의 이론에 대한 기각이라기 보다는, 분석에 대한 난해함이자, 해결에 대한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