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내가 가진 물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고증학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다음은 내가 가진 물음에 대한 나의 작은 고증학이다. 

뒤죽박죽한 나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졌었고, 그것은 그의 소외론, 정치경제학 따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사회에 대한 통치, 혹은 배제되는 사람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실패와 절망, 모더니티, 상황주의, 정신분석학, 비판이론, , 따위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처음이었을까. 

공간, 정확히 말한다면 도시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에서 내가 경험한 배제와 소외에 대한 물음이었고, 이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규명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다른 어떤 부르주아 경제학보다도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나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세계를 설명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도시가 오래된 유물과 같은 것이라면, 자본의 논리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가 제시한 가장 근대적인 기획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기획을 토대로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제시하였고, 또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대적 기획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이 여전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은 여전히 근대의 연장이며, 그의 가장 근대적이었던 기획은 시대를 잘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해체주의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바우만의 말을 들어보아라,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근대는 처음부터 유동적인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굳고 녹슨 오래되고 존귀한 표상들을 해체하고 그곳에 천박한 자본논리를 대체시켰다. 

내가 아는 근대는 탐욕스럽고 욕망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따라서 나는 여전히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를 전유하고 싶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전유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여전히, 부자의 위선에는 찬사를 보내고 빈자의 몸부림에는 비난, 아니 경멸을 표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18세기의 악행이다! 다시 맨더빌의 노랫말을 들어보자. “그러니 불평을 말아라. 바보들은 오로지 / 위대한 벌집을 정직하게 만든다고 애를 쓴다만 / 세상의 편리함을 누리며 / 전쟁에서 이름을 떨치면서도 넉넉하게 사는 것이 / 커다란 악덕 없이도 된다는 것은 / 머릿속에나 들어 있는 헛된 꿈나라 이야기일 뿐이다.”